조희제 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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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산65-3
탐방로그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회문마을 뒷산 절골 염재 조희제 선생 묘비를 찾아왔다. 염재 선생의 묘는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후손되시는 분을 만나서 위치를 안내 받기로 하였다. 도로를 통하지 않고 올라올 수 있는 길이 있었다. GPS상의 주소는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산65-3 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이다. 남다른 방법으로 애국충절의 뜻을 편 공의 공적을 길이 이어받고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종손 현직의 청을 받아 비문을 지으면서 민족사를 바르게 계승하려는 공의 뜻을 기린다.
문학박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현종 지음
여산 송성용 서
서기 1923년 4월 일
도로를 통하지 않고 올라올 수 있는 길이 있었다.
GPS상의 주소는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산65-3 이다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회문마을 뒷산 절골 염재 조희제 선생 묘비를 찾아왔다.
염재 선생의 묘는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후손되시는 분을 만나서 위치를 안내받기로 하였다.
저 곳이라는데 가운데 도로가 있어서 갈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위험하지만 인도가 없는 도로를 이용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시에 독립애국지사들의 기록으로는 매천 황현 선생이 쓰신 매천야록(梅泉野錄),
기려자 송상도 선생이 쓰린 기려수필(騎驢隨筆),
그리고 염재 조희제 선생이 쓰신 염재야록(念齋野錄)이 전해지고 있다.
염재 조희제 선생지묘
조희제 선생은 국가와 민족이 일제 침략으로 위기에 빠지자 구국을 위해 투장한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의 거룩한 애국정신을 기리며 민족사의 맥락을 계승시켜주고자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그 같은 공훈으로 1977년 국가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공의 자는 운경이며 호는 염재로 함안 조씨이다. 고종 10년 12월 10일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사동(절골?)에서 조병용과 안동 김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공은 성장하면서 유학자요 애국지사인 송병선 기우만으로부터 학문을 닦았으며 그 뒤 전우에게 사사하였다 국운이 날로 기울자 공은 문우를 넓히면서 항일투쟁사상을 더욱 앙양하는 동시에 각지를 편답하며 항일투쟁사실을 모았으며 또 일제에 의하여 우리 애국지사들이 억
울하게 탄압받고 단죄되는 법정에도 방청하여 항일투쟁사실을 모았다. 공이 기록한 사실들은 모두 애국지사들의 항일투쟁사실을 수집한 것으로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우리 민족을 극심하게 강압한 죄상을 밝히며 독립운동하던 선열들의 의로운 거사를 기술한 것이다. 공은 의병활동도 격려하고 사람들에게도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다. 특히 양병대장 이석용에 대한 일제의 부당한 공판 내용의 잘못을 밝힌 것은 호남 창의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은 때때로 옥고를 당하는 독립운동지사를 형무소로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사재로 그들의 가족을 돌보아주는 등 남모르게 항일투쟁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공은 일제의 갖가지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3.1운동때는 문하생을 참여케 하면서도 20여년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염재야록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일제침략이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애국지사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공이 수집한 각종 사료와 문집은 모두 압수되었는데 우차로 이용할 정도로 분량이 많았다. 이때 염재 선생도 체포 구금되자 친우되는 이병은은 마침 가지고 있던 염재야록의 2부를 덕촌수록으로 고쳐 보관하고 있다가 광복후에 염재야록으로 간행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투옥된 공은 일경으로부터 갓가지 회유책으로 유인되었으나 완강히 거절하며 굳건한 정신으로 민족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공의 굳은 결심을 꺽으려고 일경은 가혹한 고문을 하여 생명이 위험해지자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그들이 지정한 임실병원에 연금 치료시키다가 효과가 없자 그대로 석방해서 귀가시켰다. 그러나 이미 소생할 수 없었던 염재 선생은 곧 서거하였다. 배에 전주 최씨 부우하고 안동 권씨 부좌라. 공은 영내 승내 종내의 3남이 있고 홍순호 김장섭 이종국은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