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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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주현동 105-27
탐방로그
익산시 주현동 105-27에 위치한 익산 항일독립운동 기념관을 찾았다. 남부시장 인근 옛 대교농장 사택 자리 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이 개관한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 화랑회와 이상운 열사의 투쟁 - 1940년대에 전국적으로 40여 개의 항일학생결사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이리농림학교를 중심으로 결성된 '화랑회'는 재학생인 이상운(李相云)이 동기생인 장지환(張志煥)·김구(金九)·김영준(金英俊)·호중기(扈仲基) 등과 만든 항일 결사대 성격의 무장 투쟁 조직이었고, 1년 동안 12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5월 17일 23시 김제군 금구면 오산리 '고깔봉'의 금광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하여 김제경찰서, 금구주재소를 습격하고 주재소에서 보관 중인 무기를 가지고 일본군의 물자수송 경로 차단을 위해 만경강 철교를 폭파하려 했으나 인근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일경이 비상겨에를 펴는 바람에 계획이 실패하고 말았다. 고깔봉 화약고 습격이 미수에 그쳤고 이에 일경은 주동자를 찾기 위해 사건 당일 학교에 결석한 인원들을 확인하여 이상운 등 8명과 항일투쟁으로 퇴학당한 독립당원 5명 등 13명을 구속시켰다. 혹심한 고문으로 이상운은 그토록 원하던 조국의 해방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1945년 7월 17일에 옥에서 18세의 일기로 순국하였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는 광주 지역 학생들의 동아리가 큰 역할을 했다. 1920년대 후반 광주의 고등학교에는 대부분 독서회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학생들은 독서와 토론을 통해 제국주의의 문제점과 식민지 한국의 현실을 깨우치고 민족의식을 길렀다. 이들은 광주 지역에서 벌어진 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의 불을 지피는 데 앞장섰다.
◇ 이리 농림 항일 투쟁 - 익산 지역 학생운동의 상징성은 이리농림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리농림학교는 1922년 개교하여 농과와 임과에 각 50명씩 모집하는 입학시험에 전국에서 지원자가 몰렸다.'내선일체'를 내세운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조선인과 일본인 입학생이 반반이었으나 식민지 거주 인구 비율을 감안하면 일학부터 민족차별이 교묘하게 이뤄졌던 셈이다. 조선인 입학생은 성적 상위 10% 안에 드는 수재들이었고, 일본인은 상위 30% 이내 수준이었다. 이리농림학교에서의 학생운동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 간의 고전독서회를 조직하여 회장 박승구(농과 5년)를 중심으로 소책자를 인쇄하여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소규모 모임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다가 1930년 2월 '사상불온학생'이라는 빨간딱지를 학적부에 남기고 박승구, 진기열, 진집종이 퇴학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한 가운데 1930년 11월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다. 이날은 이리농림학교 '추계체육대회'를 보기 위해 각지에서 방문한 학부모들에게 일본교사는 조선인은 내빈용 텐트에서 나가라며 호령을 하였고 이러한 차별을 목격한 독서회 학생들은 격문을 뿌리고 학교 당국에 진정하기로 결의했다. 일본경찰은 진정서를 제출한 학생들을 검거하고 고문하여 신정근, 유현, 임경래 등이 사망하였고 주동 학생들 이름을 학적부에서 말살시켜버렸다. 1930년대 이리농림학교 학생들의 사진을 보면 복장이 일본군 병사처럼 보이는데 이는 일제가 1935년 모든 중등학교에 일본군 현역 장교를 배치하여 군사 훈련을 진행했고 이후 1939년에는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여 전쟁에 참전시켰다. 근대 영농을 배우고 수의사가 되고자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한 전국의 조선인 수재들은 교련과 학병에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
◇ 광주 학생 운동 / 1929년 광주시내에서 항일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3.1운동 이후 국내에서는 민족운동이 활발해졌으며,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민족운동 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1926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대규모 만세운동을 다시 한번 계획하였으나 지도부들이 검거되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예정대로 순종황제의 장례식 6월 10일에 '대한 독립 만세' 소리는 울려 퍼졌다. 어른들을 대신한 학생들의 용기로 이뤄낸 6.10만세운동이다. 6.10만세운동 후, 1929년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일본 남학생들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하여 일본 학생과 조선 학생들 사이에 대규모 싸움이 발생하였는데 일본 경찰은 조선 학생들만 체포하였다. 이 일은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소식을 들은 분노한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벌였는데 특히 일본 학생들과 크게 충돌했고, 사건을 편파적으로 보도한 〈광주일보〉를 습격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확립과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경찰의 교내 출입 반대 등을 요구했다. 이후 여러 사회단체들이 광주 학생 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고 지원하면서 학생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광주 학생 운동에 호응하는 학생들이 시위나 동맹 휴학이 일어났고, 약 200개 학교에서 5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기념하여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고, 2006년부터는 '학생 독립 기념일'로 부르고 있다.
左右(좌우)를 넘어 민족의 이름 아래 일제에 함께 맞선 신간회 - 배헌, 신채호, 임영택, 임혁근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안재홍.이상재.백관수.신채호.신석우 등 34명이 발기했다.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일본까지 조직된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의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는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여기에 가입하였고... 이들이 집회 등에서 하는 언동으로 보아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당시 신간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신간회의 세력이 이렇게 성장하고 일제의 탄압이 거세져서 대규모 집회를 열 수 없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대해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다가, 조병옥.이관용.이원혁 등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사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신간회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만든 단체였지만, 민족주의 진영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에 대해 사회주의 진영의 불만이 높았다. 이들은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투옥된 사이, 해산운동을 벌였으며 1931년 5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를 결의함으로써 발족한 지 4년 만에 해산되었다.
▷ 익산 지역 신간회 운동 : 1927년 3월 29일 이리에서 개최된 전북사회운동자대회에서는 '신간회에 관한 건'이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그해 4월 17일 이리청년회관에서 백남순의 사회로 신간회 익산지회 창립이 논의되었다. 설립 준비위원 6인은 배헌, 임혁근, 백남순, 양재섭, 양관해, 정한조 등이었다. 회원 36명을 모집하여 1927년 6월 29일 설립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하루 전날 일제는 배포된 선전문을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정체를 변혁하고,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취지의 문서'라고 판단하고 관련 인사들을 모두 기소하여 익산지회 창립은 무산되고 말았다. 1928년 4월 다시 한번 신간회 창립대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경찰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 일제가 익산의 신간회 지회 설립을 공권력으로 저지한 것은 그만큼 익산의 사회운동이 강렬했음을 의미한다.
일제 토지수탈의 최전선 경제침략의 현장 - ● 익산
익산은 만경강의 풍부한 농업용수, 값싼 토지가격, 양질의 토질, 1912년 호남선 개통으로 농경지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수탈의 야욕을 품은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익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익산지역의 주요 대 지주의 현황을 살펴보면 이들은 구이리, 오산면 일대, 춘포면 대장촌, 황등, 함열 등 우량농지가 분포된 지역에 집중되어있으며 특히 이리지역의 오하시농장, 대장촌의 호소카와농장, 오산면 일대의 후지흥업주식회사 등은 300만평 이상의 농지를 소유한 대 지주들이었다.
익산의 독립운동 사적지

(사적지 관련 기념비)
❶ 순국 열사 기념비 - 남부시장 솜리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❷ 삼일 운동 기념비 - 익산역 광장
❸ 순국 열사 충혼비 - 오산 면사무소
❹ 여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 여산초등학교
❺ 화랑회 이상훈의사 추모탑 - 전북대학교 익산 캠퍼스

(익산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현황)
❶ 이병기 생가(전북 기념물 제6호)
❷ 불법연구회(근대 등록문화재 제179호)
❸ 이리농림학교 학생운동지(근대 등록문화재 제178호)
❹ 구 일본인 농장가옥((근대 등록문화재 제211호)
❺ 대교농장 사무실(근대 등록문화재 제209호)
❻ 익옥수리조합(근대 등록문화재 제181호)

(익산 독립운동 관련지)
❶ 정동식 집터(익산시 모현동 2가 120번지)
❷ 백산서원(익산시 모현동2가 9-1번지)
❸ 이규홍 생가 터(익산시 석암동 351-1번지)
❹ 이규홍 기념비(익산시 석왕동 산 74-11)
❺ 유장열 집(익산시 어양동 236번지)
❻ 솜리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익산시 주현동 105-19번지 일대)
❼ 문용기 집(익산시 오산면 오산리 322번지)
❽ 옛 금마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681번지 일대)
❾ 신막 구거리 여산 3.1운동 만세시위지(여산면 원수리 573번지 일대)
❿ 임규 집 터(익산시 금라면 동고도리 822번지)
⓫ 이병기 생가(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
⓬ 불법연구회 근거지(익산시 신용동 344번지 일대)
⓭ 익산천도교회관 - 동인회창립지(익산시 창인동1가 244-1번지 주변)
⓮ 이리농림학교 학생운동지(익산시 마동 218번지)
⓯ 익옥수리조합(익산시 평화동 55, 56, 56-5번지)
⓰ 임익수리조합(익산시 황등면 황등리 349-3번지)
⓱ 호소카와 농장(익산시 춘포면 춘포리 119-1번지)
익산의 독립유공자
익산 항일독립운동 기념관
익산 항일독립운동 기념관
익산 항일독립운동 기념관 / 익산의병, 대교농장과 4.4 만세운동
1905년 을사늑약과 뒤이은 군대해산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익산의 의병은 이규홍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이 대표적이며, 5개월여간 항일투쟁을 벌였다. 대교(大橋)농장은 일제강점기 오하시은행을 소유했던 오하시요이치가 건너와 1907년 설립한 농장이다. 익산 시내 농지를 상당수 사들여 대농장으로 키웠으며, 쌀을 축적한 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하였다. 대교농장 사무실은 농업수탈의 현장을 알려주는 건물이다. 2층 목조건물로 등록 문화재 제 209호로 지정되었으며, 건물 지붕에 대교(大橋)라는 글자 문양이 새겨져 있다. 광복이후 이리화교소학교교사로 사용하였다. 익산지역의 만세운동은 3.1만세운동을 이어받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남부시장에서 행해졌다. 1,00여명 군중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수많은 군중에 위협을 느낀 일본 헌병대가 일본인 농장 관리원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문용기를 비롯한 6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여 2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39명이 체포되었다. 자주 국가를 위한 익산의 독립운동을 기억하기 위해 만세운동의 현장인 남부시장과 일제강점기 농업수탈의 현장이 대교농장 사무실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기념관 뒤편에 있는 옛 대교농장 사택 건물
그런데 10:00에 문이 열린다고 한다.
4.4 솜리만세길
4.4 솜리만세길
■ 문화재 개요 - 문화재명 :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
'솜리'는 과거 약 10여 호 정도가 거주하는 한적한 마을이었으나, 1899년 군산항 개항 이후 군산과 전주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작은 시장과 마을이 형성되었다. 1914년 동이리역이 생기면서 솜리장터(현재의 남부시장 주변) 일대가 변화하였고 1919년에는 솜리장터에서 4.4 만세운동이 있었다. 「익산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광복 이후 형성던 주단거리, 바느질거리 등 삶의 모습과 당시의 건축물이 집중 분포되어 있어 과거 이리 지역의 역사문화와 생활사를 엿볼 수 있어 보존 및 활용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고 있다.
종별 : 등록문화재(제763호) / 소재지 : 전라북도 익산시 인화동 일대
■ 개별 등록문화재
제763-1호 익산 구 대교농장 사택 / 제763-2호 익산 구 신신백화점 / 제763-3호 익산 평동로 근대상가주택 1 / 제763-4호 익산 평동로 근대상가주택 2 / 제763-5호 익산 평동로 근대상가주택 3 / 제763-6호 익산 평동로 근대상가주택 4 / 제763-7호 익산 평동로 근대상가주택 5 / 제763-8호 익산 보화당한의원 구 건조창고 / 제763-9호 익산 구 이리금융조합 / 제763-10호 익산 인북로 근대상가주택
안내판에는 이곳이 4.4만세광장으로 이름이 붙어있다.
■ 개별 등록문화재
제763-1호 익산 구 대교농장 사택
일제강점기 동이리역(東裡里驛)을 거점으로 농장을 경영했던 대교농장의 사택으로, 익산지역 3.1운동의 발생지인 4.4만세 기념공원에 인접해 있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시설로 사용되어 다양한 생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외부 형태와 벽체 마감 등에서는 원형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기념관이 열리기를 기다리는데, 이곳에 소개된 구 대교농장 사택의 사진과 실제의 모습이 다르다.
사진에는 건물 가운데 위쪽에 삼각형으로 툭 튀어나온 것이 있는데....
이곳 대교농장 사택 지하에 황금이 묻혀있다고 해서 많은 재미있는 소문이 있다.
익산 항일독립운동 기념관
익산 義(의)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위해 대교농장 앞에서 울려퍼졌던 당신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겠습니다
관람 안내도
[ 1관 : 항일운동 ] ❶ 항일 민족운동의 시작 ❷ 익산의 독립운동가 - 의병장 유장렬 - 오하 이규홍 ❸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 우정 임규 ❹ 나라 빚을 갚다, 익산 국채보상운동 ❺ 도화선, 기미독립선언 ❻ 익산지역의 만세운동 ❼ 최초의 민족 협동전선 신간회 ❽ 광주학생운동 ❾ 이리 농림항일투쟁 ❿ 화랑회와 이상운 열사의 투쟁 ⓫ 독립운동의 시대적 구분 ⓬ 독립벽
[ 2관 : 일제수탈 ] ❶ 일제 토지수탈의 최전선 익산 ❷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와 익옥수리조합 ❸ 가장 오래된 역사, 춘포역(대장촌역) ❹ 황등호의 비운과 대간선수로 ❺ 소작쟁의
[ 3관 : 4.4만세운동 ] ❶ 문용기 열사와 4.4 만세운동 ❷ 거사일을 정하다 ❸ 정의실현의 교두보 - 익산 서두교회 - 고현교회 - 제석교회 - 남전교회 ❹ 익산의 독립유공자 / 감사의 마음으로 ❺ 포토존 ❻ 익산의 사적지
◇ 익산지역의 의병투쟁 - 전북지역은 반봉건과 반외세 내건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지역이였다. 특히 익산 출신의 동학교도 오지영(吳知泳)은 익산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관군과 일본군의 강경 진압으로 실패하게 되었고,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 이전까지 전북지역 의병 활동이 소극적으로 변하는 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일제는 러일전쟁(露日戰爭) 이후 불법적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상실된 국권회복을 목표로 거병한 을사의병(乙巳義兵)과 병오의병(丙午義兵)은 이전보다 훨씬 더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전북지역의 병오의병은 1906년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최익현의 의병은 군사적 활동이 두드러지진 않지만 유림의 태두인 최익현이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항일투쟁 최전선에 나섰던 모습 자체가 촉매제가 되어 전북지역 의병 호라동에 큰 자극이 되었다.
◇ 의병장 유장렬 - 전라북도 고창 출신으로 이석용(李錫庸) 휘하의 부장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12년 항일비밀결사인 독립의군부에 가입하였다. 이후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국권반환요구서 및 일본군 철병 요구서를 제출하였고, 1914년 한훈(韓焄) 등과 같이 경상북도 풍기에서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으며 1915년 대구의 국권회복단(國權恢復團)과 협력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라도 일대에서 경찰과 친일파 처단 및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1919년 전주의 부호를 찾아가 군자금을 획득하려다가 경찰의 급습을 받고 교전 끝에 붙잡혀 징역 12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수감생활 중 추가 독립운동 활동이 탄로되어 1922년 징역 5년형이 추가 구형되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의 몸으로 15년 만에 출옥하여 거처를 익산으로 옮겨 의열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향년 83세로 생을 마감했다.
◇ 의는 힘을 이긴다 외쳤던 의병장, 오하 이규홍 - 이규홍(李奎泓)은 1881년 전북 익산군 두천면 관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탁월하여 18세에 문장과 명망이 알려지게 되고 20세에 중추원 의관직에 올랐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 격분하여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에 뜻있는 동지 박이환(朴駬桓) 문형모(文亨模)와 호남 의병장 최익현과 임병찬을 만나 창의(唱義)를 다짐하고 맹약했다. 아들의 의지를 접한 부친 이기영(李琪榮)은 '국가의 위기를 맞아 보국의 도리를 다하게 된 내아들이 자랑스럽다. 가산의 전부라도 바칠테니 오로지 국가에 헌신하라'며 아들을 후원했다. 관군에 체포되어 쓰시마섬에서 유배 중이던 최익현이 순국하자 이규홍은 최익현의 유지를 받들고자 해산된 병사 100여 명과 뜻있는 100여 인을 모아 11월 6일 거병하였다. 의병 출범식에서 이규홍은 '왜군은 힘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로써 싸운다. 의는 힘을 이긴다'고 외쳤다. 병기제작소까지 만들어 전투에 임했으며 왜군 129명을 사살하는 공적을 세웠으나 당시 익산 군수 김정기의 고발로 일본군에 의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규홍은 진안, 장수, 용담 등지의 산간으로 옮겨 다니며 계속해서 왜군과 싸웠지만 지속된 전투로 아군의 전사자 수는 늘어가고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 토벌대가 의병의 가족들까지 위협하는 상황에 봉착하여 자수하는 아군의 숫자도 늘어갔다. 1908년 4월 20일 남은 의병들과 대전 식장산 장군 바위 아래서 비참한 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의병해산을 선언한다. 당시 심정을 그의 오하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칼을 던지고 빈산에 앉아 잇으니 흐르는 눈물이 전의(傳衣)를 적신다, 저 두견새도 나의 마음을 알아서 불여귀의 슬픈 마음을 함께 울어주네" 해산 이후 이규홍은 그의 동지 박이환, 문형모와 함께 꾸준히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나 국내에서 일제에 대항하기 쉽지 않음을 느끼고 중국으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이동녕, 이광수, 안창호, 신익희 등과 접촉하였고 김규식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1920년에는 김좌진을 만나 군자금 3,000원을 지원하였다. 그해 6월 이규홍은 국내로 들어와 4년간 활동하다가 1924년 2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의 모진 고문 후에 출감하였지만 고문후유증으로 1928년 6월 6일 순국하였다.
◇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인 우정 임규 - 임규(林圭)는 1867년 전북 익산 금마에서 태어났으며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48인 중의 1인이다. 일본 게이오의숙 중학교 특별과를 거쳐 전수학교 경제과를 졸업하였고 이후 교직 활동과 출판, 조선광문회 인사로 활동하였다.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강제병합 직후 설립되었는데 일제의 기만적인 식민통치를 문화적 접근으로 대항하였다. 구성원으로는 최남선, 박은식, 유근, 김교헌, 이인승, 남기원, 주시경이 있었다. 이후 임규는 파리 평화회의와 미국 대통령 윌슨과 일본 정부의 귀족, 중의원에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1919년 3월 9일 일본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다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미결수로 1년 7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석방 이후 교직으로 돌아가 민족교육의 선봉에서 활동하며 지속적인 민족문화 보존과 사회계몽운동을 통하여 조선 문화지킴이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계명구락부에서 일하며 조선어 사전 엮기에 자신의 마지막 생을 불태웠는데 특히 '말모이' 편찬 사업에서 보여준 그의 열정은 70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임규는 한글을 지키는 것이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음을 몸소 실천했던 민족운동가였다. 해방 이후 고향인 익산 금마에서 활동했던 임규는 1948년 3월 7일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