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열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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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신용동 670-2
탐방로그
익산시 신용동 670-2에 위치한 이중열 추모비를 찾았다. 이 곳은 계문초등학교 좌표이며, 이중열 추모비는 계문초등학교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전북 익산시 신용동 670-2 계문초등학교앞 좌암 이중열 추모비를 찾아왔다.
좌암 이중열 추모비
이 비는 3.1운동 상시 익산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좌암 이중열 선생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좌암 이중열선생(1869~1928)은 천도교 이리(익산)교구장으로 있으면서 교주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3.1운동당시 이리역을 비롯하여 익산, 강경, 논산, 함열 등 각 철도역과 주요지방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일본경찰의 모진 고문을 당하며 이원규, 홍영섭, 송일성 등 아홉사람과 같이 1년간 대구형무소에서 수감하였다. 정부에서는 이중열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 좌암 이중열 추모비

좌암 이중열 추모비
이 비는 3.1운동 상시 익산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좌암 이중열 선생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좌암 이중열선생(1869~1928)은 천도교 이리(익산)교구장으로 있으면서 교주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3.1운동당시 이리역을 비롯하여 익산, 강경, 논산, 함열 등 각 철도역과 주요지방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일본경찰의 모진 고문을 당하며 이원규, 홍영섭, 송일성 등 아홉사람과 같이 1년간 대구형무소에서 수감하였다. 정부에서는 이중열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19년 3월 1일 당시 천도교 이리(裡里) 교구장을 지내면서 교주인 손병희(孫秉熙)의 지시를 받아 황등(黃登)·이리(裡里) 지구를 비롯하여 익산(益山)·강경(江景)·논산(論山)·함열(咸悅) 등 각 철도역과 주요 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며 활동하다가 피체되었다. 같은 해 4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좌암 이중열 선생은 개국 478년(서기 1869년) 6월 18일에 나시어 개국 538년(서기 1928년) 5월10일에 여의시니 세수가 60세라. 그동안 천도교 익산교구장으로 계시면서 중앙교주 손병희 선생과 결혼하고 기미독립을 꾀하였으니 3월 1일 애국동지를 규합하여 호남의 각역과 주요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요소에 첩부케 하다가 마침내 5월 14일에는 황등 함열 여산등지의 수백명 군중을 영솔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으니 함성이 천지를 진동케하였고 정기 바야흐로 태양을 향하여 높았었다. 비록 그러나 시운이 비색하여 이때가 나라 기운지 10년이라. 왜경은 마수를 뻗쳐 모든 애국지사들을 체포하였으니 선생도 이날 구인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시다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365일의 옥고를 겪으셨다. 때에 같이 형집행을 당했던 동지들이 있었으니 방명으로 적어보면 이원규 홍영섭 송일성 최재붕 김병호 전재만 유태유 서성윤 민영순 아홉분이시다.
화무 십일홍이요 인난백년수라. 이긍 이완택 씨가 60이 지났으니 그날의 애국동지들이 장수하신대도 오늘에 이르르지 못할거라 구차하게 사는 긴 생명보다 의로운 마음의 보배를 지닌 생애가 그 얼마나 갑진 것이랴. 공적을 들어 후인의 거울이 되고자하여 선생의 수도요령을 여기에 각명한다.
전북 익산시 망성면 신작리 459-18 망성면사무소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