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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 산74-11
- 탐방로그
- 익산시 석왕동 산74-11에 위치한 이규홍 기념비를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병장 오하 이규홍 기념비
의병장 오하 이규홍 기념비
오하 이규홍선생은 고종16년(서기 1881)에 이고장 익산군 두천면 관동(현 이리시 팔봉동)에서 중추원 의관 이겨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원오 관은 경주로 개국공신 성중의 19세손이다. 천자총명하여 학문이 조숙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정의로써 사람을 포용하는 덕망이 있어 약관에 중추원 의관에 피선되었다. 당시 왜적의 침략으로 국운이 누란의 위기에 ?하자 선생은 멸신보국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 박집항 문형모 와 더불어 당시 태인에서 돈헌 임병찬선생과 함께 거의를 도모하고 있던 면암 최익현선생을 찾아가 백의출병에 동참할것을 맹약하였다. 광무 10년 면암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거병하자 선생은 그에 뒤따라 자신이 조직한 의병일대를 거느리고 갈담까지 진군하였으나 면암이 거느린 의병이 순창에서 패전하고 지도적인물 전원이 체포되었다는 비보에 접하자 선생의 의병도 해산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후 대마도 구감에서 풀려나온 돈헌선생을 중심으로 하여 재거의를 도모하던중 광부 11년에 일제가 한국군대를 장제해산시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창발하게 되자 선생은 자?으로써 거병할것을 결심하고 동지를 모아 인근 각읍의 군병과 군기를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이때 의병이 257명 양총 100정 한총 200여정 탄환 200여두 화약 10여두였다.
선생의 부친 기영공은 전답 500여두락을 모두 방매하고 가장한 전곡을 군자금으로 제공하면서 아들에게 멸신보국할 것을 ??하였다. 융희 원년 11월 6일 관동에서 의병식을 가졌는데 이때 의병의 편성은 의병장 이규홍 부장 박집항 참모장 문형모 참모 송치옥 김봉우 안종문 최권호 김호 김한정 이상근 제1지대장 조재영 제2지대장 유지명 제3지대장 한성신 제4지대장 이원백 제5지대장 임성백 제6지대장 최주경 제7지대장 김문옥으로 하였다. 선생은 발군에 앞서 부하들에게 내린 훈령에서 지금 왜군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의병은 의로써 대전한다. 의는 반드시 힘을 이긴다는 신념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고 하였다. 의병은 익산 여산 고산 용담 진안 장수 진산 등지와 충남일부의 의병대 지역을 누비며 유격전을 폈으나 관병까지 함세한 왜군에 항전하는 의군의 악전고투는 형언할수 없는데다가 왜병의 의병가족에 대한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의병의 탈락자가 날로 더하여 융희2년 4월 중순에는 충남 대덕군 창장산에서 부득기 해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의 전과는 왜병 격살이 129명 의군의 사상은 89명이었다. 해산된 의병들은 지역별 지대별로 조직망을 유지하면서 지하운동에 들어가 다양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선생은 다시 돈헌의 막하에서 호남의병의 재거를 서둘렀으나 이 계획도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일제는 현상금 4000원을 걸고 선생을 검거하고자 하였으므로 대덕군 사한리 송창재 송진재택에 은신하였다가 이를 탐지한 왜경에 몰려 뒷산인 오도산성에서 왜경과 교전중 어깨에 총탄을 맞고 탈출하였다. 1918년 11월 선생은 국외에서 투쟁할것을 결심하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1920년 3월 항일운동의 무대를 만주로 옮겨 김좌진장군에게 군관학교 운영자금으로 소지금 3,000원을 헌납하고 그 해 6월 자신은 독립운동의 자금조달을 위하여 국내에 잠입 보무상을 가장하고 암약하였다. 1924년 경성에서 왜경에게 체인되에 4개월동안의 모진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자 보석출감되어 집을 떠난 17년만인 44세에 환가하였으나 형독으로 고생하다가 1929년 6월 한에 맺힌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채 향년 50세에 별세하였다. 광복후 대통령표창과
건국포장을 받았다.
아! 선생의 위국단성은 이 고장의 산천을 충혈로 물들였다. 이 거룩한 애국애족의 희생은 조국광복의 믿거름이 되었다. 생명보다 충의를, 가정보다 국가를 더욱 중히 여긴 선생의 충용정신은 배달민족의 얼을 찬연하게 들랬으며 영원히 꺼지지 않을 등불이 되어 겨레의 앞길을 비추고 있다. 산고수장에 비길 선생ㅢ 공훈을 산 교육의 지표로 삼고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여기 기념비를 세운다.
아! 선생의 위국단성은 이 고장의 산천을 충혈로 물들였다. 이 거룩한 애국애족의 희생은 조국광복의 믿거름이 되었다. 생명보다 충의를, 가정보다 국가를 더욱 중히 여긴 선생의 충용정신은 배달민족의 얼을 찬연하게 들랬으며 영원히 꺼지지 않을 등불이 되어 겨레의 앞길을 비추고 있다. 산고수장에 비길 선생ㅢ 공훈을 산 교육의 지표로 삼고 이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여기 기념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