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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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5-14
탐방로그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5-14 대둔산도립공원 구 매표소 부근 동학농민혁명대둔산항쟁전적지 동학항쟁 전적비를 찾았다. 당시 원형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5-14 대둔산도립공원 구 매표소 부근 동학농민혁명대둔산항쟁전적지 동학항쟁 전적비를 찾았다.
동학혁명최후항전유적지
또 만난 대둔산도립공원 안내도에도 대둔산 삼선계단 왼쪽 동학혁명최후항전유적지 글자가 보인다.
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전적비
대둔산항쟁전적비 안내문. 동학 농민혁명 - "19세기말 조선은 조정의 실정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하고 국력이 쇠진하였다. 그 틈을 탄 일본국이 대륙침공의 야심을 갖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 때 조선의 농민들이 봉기하여 부패한 조정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894.10.10. 전봉준(全琫準)을 필두로 전라도 삼례에서 수십만의 동학농민혁명군이 기포하여 서울로 북진하는 도중 동년 12월초에 공주전투에서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퇴각할 때 최공우를 중심으로 한 高山(고산), 銅山(동산), 華山(화산) 군현의 동학농민군 천여명이 이곳 大芚山(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3개월간 항쟁하였다. 1895.2.18. 거점지인 대둔산 석두골(798m)에서 농민군 지도자급 25명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때 동학접주(金石醇 : 김석순)은 한 살쯤 되는 여아를 품에 안고 150m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하니 얼마나 처참한 역사의 현장인가!
이곳에서 희생된 영령을 추모하고 우리나라 근대사에 빛나는 동학농민 혁명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 새로운 민족사의 거름으로 삼고자 한다."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일대 사건이자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위해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최대의 민중항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쟁이기에 그 흔적이 대둔산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대둔산은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894년 2차 봉기 이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 주력이 삼례를 출발하여 여산, 논산을 거쳐 공주 우금티에서 관군.일본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화력과 조직력의 열세로 결국 패하였다. 우금티 전투 패배 이후 농민군 일부는 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관군.일본군에 맞서 항전하였다. 1894년 12월 중순부터 다음 해 2월 중순까지 70여일 간 항전하던 농민군은 1895년 2월 18일(음력 1.24)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대둔산 항전지는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부분 사라진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역사적 현장으로 동학혁명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당시 원형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완주 대둔산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일대 사건이자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위해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최대의 민중항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쟁이기에 그 흔적이 대둔산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대둔산은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894년 2차 봉기 이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 주력이 삼례를 출발하여 여산, 논산을 거쳐 공주 우금티에서 관군.일본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화력과 조직력의 열세로 결국 패하였다. 우금티 전투 패배 이후 농민군 일부는 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관군.일본군에 맞서 항전하였다. 1894년 12월 중순부터 다음 해 2월 중순까지 70여일 간 항전하던 농민군은 1895년 2월 18일(음력 1.24)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대둔산 항전지는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부분 사라진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역사적 현장으로 동학혁명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당시 원형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19세기 말 일제의 침략과 조선조의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나라에 바친 동학농민 의병의 넋을 영원히 기리고자 이곳 대둔산 전적지에 작은 비를 세우다.
서기 2001년 2월 18일
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전적비

대둔산항쟁전적비 안내문. 동학 농민혁명 - "19세기말 조선은 조정의 실정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하고 국력이 쇠진하였다. 그 틈을 탄 일본국이 대륙침공의 야심을 갖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 때 조선의 농민들이 봉기하여 부패한 조정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894.10.10. 전봉준(全琫準)을 필두로 전라도 삼례에서 수십만의 동학농민혁명군이 기포하여 서울로 북진하는 도중 동년 12월초에 공주전투에서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퇴각할 때 최공우를 중심으로 한 高山(고산), 銅山(동산), 華山(화산) 군현의 동학농민군 천여명이 이곳 大芚山(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3개월간 항쟁하였다. 1895.2.18. 거점지인 대둔산 석두골(798m)에서 농민군 지도자급 25명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때 동학접주(金石醇 : 김석순)은 한 살쯤 되는 여아를 품에 안고 150m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하니 얼마나 처참한 역사의 현장인가!
이곳에서 희생된 영령을 추모하고 우리나라 근대사에 빛나는 동학농민 혁명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 새로운 민족사의 거름으로 삼고자 한다."
척양척왜 보국안민

이곳 대둔산의 옛이름은 한등산이다. 1894년 봄, 고부에서 비롯된 동학농민혁명은 충청, 경상, 강원, 경기, 황해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가을에는 수만의 농민군이 삼례에 모여 서울을 향해 진군하였다. 11월초에 이르러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일본군의 무력에 밀려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최공우가 이끄는 농민군 부대는 11월 중순부터 이곳 대둔산으로 들어왔다. 석두골 위쪽 형제바위 옆 150미터 높이의 암반을 근거지로 삼아 산의 북쪽 염정골(현재 논산군 벌곡면 도산리 일대)을 비롯한 주변 마을과 연계하면서 3개월 동안 정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인 항전을 계속하였다. 대둔산 농민군 진지는 이듬해인 1895년 2월 18일 새벽 안개를 틈탄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김석순은 한살난 아들을 품에 안고 150미터 절벽을 뛰어내려 장열한 최후를 맞았고 전사한 농민군 25분 가운데에는 20대 후반의 임산부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25분의 농민군이 처절한 최후를 맞은지 100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선조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그 장열한 희생을 잊고 살아왔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이에 1998년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원광대학교 사학과와 함께 이곳 대둔산 농민항쟁 유적지를 찾아내고, 완주군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에서는 이곳에서 희생된 25분의 농민군 영령을 추모하고 우리 근대사를 열어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 새로운 민즉사의 거름을 삼고자 이 작은 돌을 여기에 세운다.
2001년 2월 18일 신순철 짓고 여태명 쓰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 완주군
이곳 대둔산의 옛이름은 한등산이다. 1894년 봄, 고부에서 비롯된 동학농민혁명은 충청, 경상, 강원, 경기, 황해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가을에는 수만의 농민군이 삼례에 모여 서울을 향해 진군하였다. 11월초에 이르러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일본군의 무력에 밀려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최공우가 이끄는 농민군 부대는 11월 중순부터 이곳 대둔산으로 들어왔다. 석두골 위쪽 형제바위 옆 150미터 높이의 암반을 근거지로 삼아 산의 북쪽 염정골(현재 논산군 벌곡면 도산리 일대)을 비롯한 주변 마을과 연계하면서 3개월 동안 정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인 항전을 계속하였다. 대둔산 농민군 진지는 이듬해인 1895년 2월 18일 새벽 안개를 틈탄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김석순은 한살난 아들을 품에 안고 150미터 절벽을 뛰어내려 장열한 최후를 맞았고 전사한 농민군 25분 가운데에는 20대 후반의 임산부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25분의 농민군이 처절한 최후를 맞은지 100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선조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그 장열한 희생을 잊고 살아왔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이에 1998년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원광대학교 사학과와 함께 이곳 대둔산 농민항쟁 유적지를 찾아내고, 완주군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에서는 이곳에서 희생된 25분의 농민군 영령을 추모하고 우리 근대사를 열어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 새로운 민즉사의 거름을 삼고자 이 작은 돌을 여기에 세운다.
2001년 2월 18일 신순철 짓고 여태명 쓰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 완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