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 417-3
- 탐방로그
- 동학농민혁명봉기비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 417-3에 위치해 있다. 해당 주소는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으로,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내에 동학농민혁명봉기비가 있다. 삼례는 동학농민혁명의 전사를 이루는 〈교조신원운동〉 시기에 동학교도들 수천 명이 모여 삼례집회를 개최한 곳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제2차 기포에 앞서 전봉준이 이곳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기포를 준비한 곳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동학농민혁명봉기비
전봉준 대장이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지금 나라가 어지러울 게 스스로 마음을 속이며 어찌 일순간이라도 명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일본 침략자들이 구실을 만들어 군대를 동원해 우리 임금을 핍박하고 우리 백성을 어지럽히니 어찌 그대로 참을 수 있겠는가. (중략) 각하께서도 크게 반성하여 의(義)로써 죽음을 같이하면 천만다행이겠다."
"지금 나라가 어지러울 게 스스로 마음을 속이며 어찌 일순간이라도 명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일본 침략자들이 구실을 만들어 군대를 동원해 우리 임금을 핍박하고 우리 백성을 어지럽히니 어찌 그대로 참을 수 있겠는가. (중략) 각하께서도 크게 반성하여 의(義)로써 죽음을 같이하면 천만다행이겠다."
전봉준 재판기록 중에서
"일본이 개화를 핑계대고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민간에 알리지 않고 또 격서도 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도성에 들어와 왕궁을 부수어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하기에 초야의 사민들이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개탄스러움을 참을 수 없어 의병을 모아 일본과 싸워서 그 사실을 따지고자 함이다."
"일본이 개화를 핑계대고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민간에 알리지 않고 또 격서도 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도성에 들어와 왕궁을 부수어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하기에 초야의 사민들이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개탄스러움을 참을 수 없어 의병을 모아 일본과 싸워서 그 사실을 따지고자 함이다."
동학농민혁명봉기비 - 척왜양창의
삼례벌은 일제의 조선 침략에 맞서 투쟁한 역사의 고장이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 고종을 연금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이곳 삼례에서 구국항일의병을 일으켰다. 10만 여 농민군은 북상하면서 충청도 일대의 농민군과 연합부대를 이루었다. 이에 맞추어 경상,강원,경기,황해도 등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함으로써 조선 전역에 항일의 기치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나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석패하여 서울 입성의 뜻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그후 치욕적인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였으나 동학농민혁명의 기운은 멈추지 않고 3.1독립운동 등 근대 민족.민중운동의 큰 산맥으로 이어졌다.
2003년 10월 10일
2003년 10월 10일
폐정개혁 12개조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쌓인 원한을 씻고 서정(庶政)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하게 징벌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하게 징벌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문서는 소각한다.
6. 갖가지 천인들의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의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재혼을 허락한다.
8. 무명의 잡세는 모두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일본인과 내통하는 자는 엄중히 처벌한다.
11. 빚은 공적인 것이나 개인의 것이나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경작한다.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쌓인 원한을 씻고 서정(庶政)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엄하게 징벌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하게 징벌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문서는 소각한다.
6. 갖가지 천인들의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의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재혼을 허락한다.
8. 무명의 잡세는 모두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에는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일본인과 내통하는 자는 엄중히 처벌한다.
11. 빚은 공적인 것이나 개인의 것이나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경작한다.
대동의 장
.동학농민봉기 삼례집회 당시의 농민군중 운집의 터를 재현
조형물 : 힘-하나되어
.민초 농민들의 뜻이 하나로 결집된 의지의 기치, 도는 이상의 푯대, 힘을 상징
.누구든 소망을 담은 돌을 얹어놓은 행위를 통한 무한다수 공동제작의 개념, 참여의식의 발현에 의한 지속적인 확산과 계승을 의도.
.동학농민봉기 삼례집회 당시의 농민군중 운집의 터를 재현
조형물 : 힘-하나되어
.민초 농민들의 뜻이 하나로 결집된 의지의 기치, 도는 이상의 푯대, 힘을 상징
.누구든 소망을 담은 돌을 얹어놓은 행위를 통한 무한다수 공동제작의 개념, 참여의식의 발현에 의한 지속적인 확산과 계승을 의도.
추념의 장
.이름없이 스러져간 농민군들의 넋을 위로하고 추념하며 자아존재와 역사와 우주, 즉 '나'-'동학농민군상'-'하늘'이 거울에 중첩 반추되는 영상속에서 하나되는 체험을 통하여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핵심인 인내천 사상을 인과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사유의 장으로서, 경건의 돔으로 조형.
.이상세계에서 서로 일체화로 어우러진 동학농민군들의 역동적 모습을 표현하여 현실에서 이루지못한 그들의 한을 달래는 의미와 함께, 독립적공간을 형성하면서도 동시에 대기와 빛과 시야가 통과되어 주변환경과 유기적 일체공간을 이루는 투조구조는 산화한 농민군들의 영령들에게 부여하는 완전한 자유의 상징.
.이름없이 스러져간 농민군들의 넋을 위로하고 추념하며 자아존재와 역사와 우주, 즉 '나'-'동학농민군상'-'하늘'이 거울에 중첩 반추되는 영상속에서 하나되는 체험을 통하여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핵심인 인내천 사상을 인과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사유의 장으로서, 경건의 돔으로 조형.
.이상세계에서 서로 일체화로 어우러진 동학농민군들의 역동적 모습을 표현하여 현실에서 이루지못한 그들의 한을 달래는 의미와 함께, 독립적공간을 형성하면서도 동시에 대기와 빛과 시야가 통과되어 주변환경과 유기적 일체공간을 이루는 투조구조는 산화한 농민군들의 영령들에게 부여하는 완전한 자유의 상징.
농민군 4대 명의
1.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不殺人 不殺物 : 불살인 불살육)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忠孝雙全 濟世安民 : 충효쌍전 제세안민)
3.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斥洋倭夷 燈淸聖道 : 척양왜이 등청성도)
4. 군사를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모두 없앤다(驅兵入京 盡滅權貴 : 구병입경 진멸권귀)
1.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不殺人 不殺物 : 불살인 불살육)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忠孝雙全 濟世安民 : 충효쌍전 제세안민)
3.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斥洋倭夷 燈淸聖道 : 척양왜이 등청성도)
4. 군사를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모두 없앤다(驅兵入京 盡滅權貴 : 구병입경 진멸권귀)
전북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 417-3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동학농민혁명봉기비를 찾았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일본군과 탐관오리들을 쫓아내기로 결의한 농민군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농민군은 스스로 의병이라 불렀고, 집강소 통치를 실현한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이 넘쳤다. 동학농민혁명의 제2차 기병을 알리는 삼례봉기는 근대 민족.민중운동의 출발이요 새로운 한국사회를 밝히는 위대한 횃불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성격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 봉건 수탈이 심화되고 밖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이 가속화될 때 호남의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반봉건.반침략의 기치를 내걸고 1894년에 일어난 민족.민중운동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 봉건 수탈이 심화되고 밖으로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이 가속화될 때 호남의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반봉건.반침략의 기치를 내걸고 1894년에 일어난 민족.민중운동이었다.
제1차 기병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한다"는 취지의 격문을 날리고 일어난 호남 농민군은 고부 황토재에서 감영군을 물리치고 장성 황룡천에서 경군을 격파한 뒤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한다"는 취지의 격문을 날리고 일어난 호남 농민군은 고부 황토재에서 감영군을 물리치고 장성 황룡천에서 경군을 격파한 뒤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집강소 통치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그 힘으로 집강소 통치를 실시하여 온갖 폐단을 제거하고 양반과 상놈, 남녀의 차별을 허물어 누구나 고르게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국가의 사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그 힘으로 집강소 통치를 실시하여 온갖 폐단을 제거하고 양반과 상놈, 남녀의 차별을 허물어 누구나 고르게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국가의 사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민씨 척족들은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이를 빌미로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뒤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민씨 척족들은 농민군을 진압하려고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이를 빌미로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뒤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 하였다.
삼례 제2차 기병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커다란 위기감을 느낀 호남 농민군은 "나라를 구하는 의병 대열에 합류하라"는 통문을 날렸고 마침내 전국의 농민군은 집강소 통치를 잠시 접고 일본군을 물리치고자 삼례뜰에 다시 모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커다란 위기감을 느낀 호남 농민군은 "나라를 구하는 의병 대열에 합류하라"는 통문을 날렸고 마침내 전국의 농민군은 집강소 통치를 잠시 접고 일본군을 물리치고자 삼례뜰에 다시 모였다.
삼례뜰의 입지 조건
삼례뜰이 재기병 장소로 선택된 것은 삼례가 전주에서 멀지 않은 역촌으로서 길이 사방으로 트여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였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삼례의 주막에 모여 재기병을 결의하고 통문을 날렸던 것이다.
삼례뜰이 재기병 장소로 선택된 것은 삼례가 전주에서 멀지 않은 역촌으로서 길이 사방으로 트여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였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삼례의 주막에 모여 재기병을 결의하고 통문을 날렸던 것이다.
삼례뜰에 집결하는 농민군
어느덧 삼례뜰에는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농민군, 그리고 무기와 군량미를 실어나르는 대열이 끝없이 이어졌고, 전주성을 점령하고 집강소 통치를 실현한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어느덧 삼례뜰에는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농민군, 그리고 무기와 군량미를 실어나르는 대열이 끝없이 이어졌고, 전주성을 점령하고 집강소 통치를 실현한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타오르는 항쟁의 횃불
삼례뜰에 집결한 농민군은 다시 전봉준을 대장으로 삼고 일본군과 탐관오리들을 쫓아내기로 다짐하였다. 진격의 순간을 눈 앞에 둔 삼례뜰에는 항쟁의 횃불이 타오르면서 갑자기 새 세상이 열린 듯했다.
삼례뜰에 집결한 농민군은 다시 전봉준을 대장으로 삼고 일본군과 탐관오리들을 쫓아내기로 다짐하였다. 진격의 순간을 눈 앞에 둔 삼례뜰에는 항쟁의 횃불이 타오르면서 갑자기 새 세상이 열린 듯했다.
북상하는 농민군
드디어 농민군 10만여 대군은 '척왜양창의' '제폭구민' '광제창생' 등의 깃발을 앞세우고 삼례를 출발하였다. 논산과 노성을 거치는 동안 재기병에 합류하는 지사들의 행렬로 농민군 대열은 끝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드디어 농민군 10만여 대군은 '척왜양창의' '제폭구민' '광제창생' 등의 깃발을 앞세우고 삼례를 출발하였다. 논산과 노성을 거치는 동안 재기병에 합류하는 지사들의 행렬로 농민군 대열은 끝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공주 우금치 대회전
농민군은 항일전선에 동참하자는 호소문을 띄우고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큰 싸움을 벌였다. 일본군의 현대 무기앞에 무참히 쓰러져 간 농민군, 그러나 대둔산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일 때까지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농민군은 항일전선에 동참하자는 호소문을 띄우고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큰 싸움을 벌였다. 일본군의 현대 무기앞에 무참히 쓰러져 간 농민군, 그러나 대둔산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일 때까지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