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용복리 278
- 탐방로그
- 애국지사 백산 장병구 선생 구국비는 완주군 경천면 용복리 278에 위치해 있다. 장병구 선생 국국비 부근에서 독립운동 추념비도 함께 찾아볼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백산 장병구 선생 구국비
추모시 - 백산 장병구 선생 영전에
대둔산 정기 어리고 화암사 불경소리 감도는 용복골짜기에 조국의 광복과 栢山(백산)을 축복하는 동념의 햇살이 찬란히 投射(투사)하는도다.
심산유곡 동굴에서 독립자금 조달하려다 무고한 육년 옥고를 臥薪嘗膽(와신상담)의 심경으로 출옥 후 항일운동 계속하다가 갖은 탄압을 애국정신의 일념으로 생애를 불태우신 조국의 수호신이여!
白竹(백죽) 같은 性情(성정) 泰山(태산) 같은 義氣(의기) 구국일념으로 한 生(생)을 오롯이 바치심은 애국애족의 고결하고 狷介(견개)하신 생애셨습니다.
광복된 조국의 영광 도약하는 민족의 웅비 이제 彼岸(피안)에서 기뻐하시고 기원하여 주시옵소서 영생에 복락을 누리시옵소서
김대종 지음 오정문 씀
대둔산 정기 어리고 화암사 불경소리 감도는 용복골짜기에 조국의 광복과 栢山(백산)을 축복하는 동념의 햇살이 찬란히 投射(투사)하는도다.
심산유곡 동굴에서 독립자금 조달하려다 무고한 육년 옥고를 臥薪嘗膽(와신상담)의 심경으로 출옥 후 항일운동 계속하다가 갖은 탄압을 애국정신의 일념으로 생애를 불태우신 조국의 수호신이여!
白竹(백죽) 같은 性情(성정) 泰山(태산) 같은 義氣(의기) 구국일념으로 한 生(생)을 오롯이 바치심은 애국애족의 고결하고 狷介(견개)하신 생애셨습니다.
광복된 조국의 영광 도약하는 민족의 웅비 이제 彼岸(피안)에서 기뻐하시고 기원하여 주시옵소서 영생에 복락을 누리시옵소서
김대종 지음 오정문 씀
애국지사 백산 장병구 선생 구국비
단군으로부터 계승한 5천년 역사에 처음으로 이 민족에게 국권이 찬탈되고 국민의 생존권이 박탈되어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대둔산의 정기 담아 화암사의 불연으로 금당 마을에 탄생하시게 된 기연이시다. 선생의 성은 장이요 명은 병구이시고 백산은 그 아호이시니 1897년 12월 11일에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에서 출생하시니 부는 장만식 모는 오성녀와의 장남이시요 흥성 장씨 유의 28세손이시다. 선생은 유시로부터 성품이 항직하여 정의로운 생활을 하시며 기골이 강정하시고 엄부 자모의 슬하에서 유학을 수학하시며 호연지기의 기상을 함양하며 성장하셨다. 선생은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위태롭고 국민의 생존권이 위협받음에 그 비분강개함이 기미 3.1독립만세운동으로 일어날때 고산 장날에 국하현 등과 함께 만세운동에 앞장을 서시고 그후로 오직 항일정신으로 살아오시던 중 백야 김좌진 철기 이범석 장군과 김영한 김조현 등으로부터 군자금 조달을 지시받고 조달할 방법이 막연하자 김명섭 서보국 김치삼 문병래 이홍구 등과 함께 의견의 일치를 본 후 선생께서 앞장을 서서 독립군 활동장소를 마련하고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인쇄기를 손수 운반하였고 원지를 연산역에서 인수하여 금당리까지 운반하셨다.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 증표와 태극기를 품속에 간직하고 손에는 장검을 들고 우국충정을 맹세하셨다. 인쇄는 1922년 5월 중순경에 시작하였는데 조선은행권 1원권 4만여 매와 일본은행권 50전 3천매를 인쇄하고 또한 격문을 인쇄하여 왕겨 가마니에 포장하여 그해 7월 중순경 대전 근방에서 안희제 선생이 경영하는 백산상회로 보내기 위하여 기다리던 중 독립군 1인이 독립군 의복을 사려다 중국인의 신고로 체포되어 군자금 사실을 자백하게 되어서 선생과 함께 7명이 강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문초와 고문의 모진 고통을 오직 구국항일정신으로 참고 이겨내셨으나 인쇄한 돈의 사용처가 독립군 군자금임이 드러나자 1922년 12월 27일에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의 형을 언도받고 1923년 1월 10일에 김명섭 서보국 김치삼 등과 대구형무소로 이감된 후 혹독한 옥고를 치르셨으나 독립에의 의지는 오히려 충만하셨다. 청춘의 젊음을 옥중에서 보내신 선생은 1928년 1월 하순경 출옥되셨다. 선생은 옥고의 후유증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던 중 38세의 연세로 안을 임씨와 결혼하셨다. 그후로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법적으로 투쟁하면서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을 위하여 일하시던 중 오랜 지병으로 허약해진 선생은 너희들은 공부를 하여 나라를 위해서 견위수명하라는 유언을 남기신 후 생을 83세로 타계하
셨다. 슬하에는 서규 완규 동규 진규 백규 항규 장손인 옥영을 두셨다. 선생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1992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1993년 10월 12일에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1994년 10월에 구국비를 마을 앞에 건립하였다. 오호라! 선생의 백죽 같은 성정과 태산 같은 의기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할수록 구국정신은 오히려 구국충천하신 구국일념의 고결하고 연개하신 생애이셨습니다. 선생의 유업을 숭앙하고자 여기에 탑을 세우니 애국지사 백산 장병구 구국비라 명한다.
1994년 10월 김대종 근찬 오정문 근서 장선희
1994년 10월 김대종 근찬 오정문 근서 장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