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숙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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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도룡리 805-5
탐방로그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앞 선산에 있던 양춘영(양윤숙)의병장의 묘가 인계면 도룡리 선산으로 옮겼다고 되어있다. 위치에 대한 설명도 "인계면소재지 조금 못미쳐 대로변" 이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도룡리로 와서, 혹시 싶어서 줌을 당겨보니 의병장 묘가 맞았다. 이 곳의 GPS 상의 주소는 순창군 인계면 도룡리 산 208-1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기협, 교훈관 한자선이었다. 그리고 양공자신은 도총독으로서 특별히 선발된 120명의 용사들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1909년 12월 3일 공이 김제군 월출면 봉월리부근에서 일본수비대에게 체포되기까지 약 1년반동안 공과 예하부대들은 순창, 남원, 임실내 각처에 산재하는 일본의 수비대를 습격 수십차의 전투를 벌려 많은 전과를 올렸으니 그 내용은 재판기록과 일경의 비밀문서에 상세하다. 생각컨대 양공의 항쟁한 시기는 일제의 침략술책과 일부 매국적의 내응으로 500년 사직이 일조에 무너져 가는 때였다. 다행히도 양공과 같은 숭유술중명절의 500년 전통을 이어받은 이 나라의 만은 유생들이 전국 각처및 해외에서 분기하였으나 이미 기울은 국은은 그들의 입절사의로도 어찌할수가 없었다. 나라는 곧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양공을 포함한 저들 순국선열들은 죽어서도 결코 흙이 되지않았으며 영생불후의 웅걸지혼로서 조국의 독립을 명명지중에 도와 끝내는 을유의 광복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오늘 번영조국에 생을 누리는 후생들로서는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잊을수있겠는가? 다만 양공의 경우는 불행히도 그 사적마저 오랫동안 묻혀서 세상에 아는이가 극히 적었던바 수년전에 당시의 남원양씨 대종회 양상곤회장과 종인 양만정교장의 각별한 노력으로 그 일부가 밝혀지고 1980년 8월에는 정부로 부터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받는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여기에는 보훈처와 순창군수의 발의와 협조, 양병창대종회장과 양교장의 추진 그리고 역사일공을 담당했고나선 고인의 윤자 병관의 성의가 모두 합쳐저 힘이되었다. 양공의 휘는 춘영 또는인영이요 자는 윤숙이며 훈계는 호이다. 공은 고려말 순창 귀미에 입거한 이래 이 지방 명문의 하나로 칭을 받았던 남원양씨의 일원으로 쌍매당 휘 사민 의11대손이며 진사공 휘 시익의 10대손이다.1875년 12월 2일에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에서 고절형장군 용? 휘 부호군검 중추 휘 석민과 비 해주오씨의 장자로 태어난 공은 어려서 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재예가 총?하여 일찌기 경서와 제자서를 섭렵하였고무예의 수련에도 힘썼으며 한때에는 팔장하여 참봉과 주사직을 지낸일도 있다. 배위는 도강 김씨 장흠의 녀로 1967에 94세로 졸하였는바 무사하여 제 택영의 자 병관을 속자로 삼았고 묘는 공묘에 부하였다. 병관은 부안김씨를 취하여 록 만주, 만국, 만성등 4만과 2녀를 두었으니 장녀 여경은 정?현에게 차녀 선경은 혁승돈에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앞 선산에 있던 양춘영(양윤숙)의병장의 묘가 인계면 도룡리 선산으로 옮겼다고 되어있다.
위치에 대한 설명도 "인계면소재지 조금 못미쳐 대로변" 이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도룡리로 와서, 혹시싶어서 줌을 당겨보니 의병장 묘가 맞다.
GPS 상의 주소는 순창군 인계면 도룡리 산 208-1이다.
양춘영은 순창의 회문산을 근거지로 신출귀몰한 전술로 일본군인과 경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현지 주민들은 그를 신처럼 추앙했다. 한말 호남의병사에서 전투적으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 바로 양춘영 의병장이다.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대부분 그의 자인 윤숙으로 돼 있으나 때로는 연영, 인영, 또는 춘영으로 불렸다. 그가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개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되나, 족보에는 춘영으로 기록돼 있다.
양춘영은 1906년 음력 4월 최익현과 임병찬이 일으킨 병오창의에 참여함으로써 의병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이때 의병 모집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4월 20일에 있었던 전투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최익현이 “동족끼리 피를 볼 수 없다”며 해산명령을 내려 의병진이 무너지자, 은신에 들어갔다.
190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재개하고, 1908년 7월 2일에는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활동했던 순창 회문산 근처의 의병들이 모여 ‘호남의군부’를 조직, 하나의 통합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양춘영은 도총독의 직책을 맡는다. 일본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이때 의병의 총 수는 1천200명이었고, 그 중 정예병을 선발해 양춘영이 직속부하로 삼았다고 한다.
이곳 순창군 인계면 독이봉 기슭에 자리한 이 묘는 1910년 3월 9일 당시의 일제통감부치하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소에서 교수형의 선고를 받고 동년 4월 14일 광주감옥 전주분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의병장 양공께서 잠든곳이다. 당시 공의 나이는 36세 양공이 구국항일의 대열에서 처음 참여하는것은 1906년 6월 면암 최익현이 태인에서 돈헌 임병찬과 더불어 의거하였을때 그 막하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돈헌의 창의일기에 공의 활약상이 나타나있다. 그러니 공이 본격적으로 항일의려를 일으키는것은 1908년 음 7월부터이니 이는 위 최면암, 임돈헌의 부대가 태인거사 10여일만에 순창에서 무진지 약 2년후의 일이었다. 송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공은 이해 음7월2일에 몇몇 동지들과 더불어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회문산에 본부를 설치하여 한편으로는 격문과 통장을 호남의 각향교및 그 밖의 여러곳에 발송하여 창의를 호소하고 또 한편으로는 모여든 의병을 편성훈련하였다. 위 기록에 나타난 당시의 군세를 보면 병수가 1,200명에 총이 270정, 칼이 300자루였으며 부서에 있어서는 좌선봉에 최화, 우선봉에 임순호, 중군 최산흥, 훈군 이국찬, 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