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피체유적비(녹두장군 전봉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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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276
탐방로그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276에 위치한 녹두장군 전봉준관을 찾았다. 이곳은 정읍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동학혁명가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곳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피체되었던 피노마을 주막을 복원한것같다.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276 녹두장군 전봉준관을 찾았다.
녹두장군 전봉준관
이곳은 정읍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동학혁명가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곳입니다.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비
全琫準 將軍 皮逮 遺蹟碑(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비)
전봉준 장군은 일찍이 동학에 입교하여 농민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혁명의 대의를 천명하였다.
갑오년 3월 창의문이 선포되고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의 함성은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외세의 개입으로 전봉준 장군과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퇴하였고, 11월 정읍 입암산성으로 몸을 숨긴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전봉준 장군은 백양사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 김개남장군을 만나기 위해 이곳 피노리에 피신중 당시 고부군 달천면 달천리(현 정읍시 덕천면)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일본 헌병대에 인계되었다. 12월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 장군은 이듬해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 장군 등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새로운 역사를 열고자 했던 혁명의 중심에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항거한 전봉준 장군의 뜻을 기리고자 삼가 비를 세운다.
서기 2005년 5월 4일 순창군수 강인형
녹두장군 전봉준관
역사의 현장 회문산(回文山)
회문산(回文山)은 진안의 마이산 한 자락이 서남쪽으로 가다가 임실(任實).전주(全州) 사이을 지나 남쪽에 이르러 부흥산(復興山)과 정읍 노령(蘆嶺)을 이룬 곳에 우뚝 서 있는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있다.
'옥천지(玉川誌:1760)'에서는 회문산에 대해 "군(郡)에서 북족으로 32리 거리에 있고 임실과 태인의 경계이며 태인 운주산에서 동쪽으로 흘러온 지류가 이 산이 되었다. 옛날 이 산에는 돌로 된 문이 있었는데 심히 기이한 연고로 일명 회문(回門;음차 돌회)이라 하였다. 넓게 트여진 형세가 십여 리에 이어져 있고 산이 높아 구름에 이르며 여러 지역에 걸쳐있는 큰 산이다. 백룡이라는 큰 도적이 이 산에 기거하고 있고 봉우리 꼭대기에는 아직도 은신처가 있다"고 기록되었다.
봉우리와 골짜기가 많아 첩첩산중을 이룬 천혜의 요새 회문산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특히 피노리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이 농민이 주인되는 변화된 세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피체된 현장이며, 전라도의병 활동근거지,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전봉준(全琫準)과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조선후기는 사회.경제적인 변화의 물결이 민중운동을 통해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우리나라 민중운동사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동학농민혁명과 그 지도자 전봉준이 활약했던 변화와 개혁의 시기였다. 내부적인 부패와 착취, 외부적인 서양열강과 일본의 자본침투는 조선사회의 변화를 강요하였고, 이러한 요구에 앞서 전봉준을 비롯한 선각자들은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 하였다.
1855년 고부군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무너져가는 조선사회를 비장하게 바라보다가 변혁을 지향하는 동학에 입도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평등사상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동학교단을 통해 조선사회의 변혁을 이끌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봉준의 의지와 신념은 1894년 고부농민봉기를 시작으로 하여 5월 동학농민군이 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화약'을 맺으면서 실현되었다. 순창을 비롯한 개혁안을 통해 사회혼란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진압을 위해 끌어들인 청.일양국간의 분쟁이 전쟁으로 비화되어 나라가 위급해지자 전봉준은 삼례에서 다시 기병을 한다. 호남.호서농민군이 공주에서 관군.일본연합군과 전투를 벌리고, 결국은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패퇴하고 만다. 전쟁에 패하고 일본군과 관군에게 쫓기는 전봉준은 정읍 입암산성, 백양사 등지로 피해다니며 다시 한번 봉기할 기회를 노리던 중 옛 부하의 밀고로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된다.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1.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묶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서정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의 그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
5. 노비문서는 태워버릴 것
6. 7반 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씌우는 평량갓을 벗게할 것
7. 청춘과부의 재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는 모두 폐지할 것
9.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할 것
10.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난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 분작하게 할 것
순창(淳昌)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일지(日誌)
1894년
3월 20일 농민군이 무장에서 봉기하고는 포고문을 선포하다. '오하일문'
3월 25일 농민군이 태인에서 점심을 먹고 금구 원평에서 하룻밤을 묵다. '오하일문' 백산으로 진을 옮기고 대회를 열어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다. '동학사'
4월 7일 농민군이 새벽까지 벌어진 황토현 싸움에서 승리하다. '양호소토승록'
4월 27일 농민군이 금구에서 전주 삼천을 거쳐 전주부를 점령하다. '양호소토승록'
5월 7일 전주화약을 맺다. '양호전기'
6월 6일 전봉준과 차장 김조감이 이끄는 농민군 500여 명과 일본 천우협이 순창에서 만나다. 전봉준은 이들에게 여러 고을을 순행한 목적이 폐정개혁에 있음을 천명하다. 이때 순창을 비롯한 남원지역은 매우 평온하다. '이육신보'
6월 8일경 순창에 있던 전봉준 등은 전에 무고한 농민군을 체포 살해한 금구와 나주 지방관에 대한 문책과 순창군의 폐정 2개항에 대한 시정을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강력히 요구하다 '초정집'
6월 9일 전봉준이 순창에서 담양으로 가다. '이육신보'
11월 10일경 후퇴하던 북접농민군은 순창으로 다시 집결하여 임실을 거쳐 장수읍을 점거하다. '천도교창건사'
11월 29일 전봉준이 입암산성으로 후퇴하다. '일본사관함등'
11월 30일 남소사랑이 이끄는 일본 대대병이 전봉준이 입암산성에 숨어 있는 것을 듣고 군관.경병과 함께 갔으나 전봉준은 이미 백양사로 도망가다. '일본사관함등'
12월 2일 전봉준이 체포당하다. 김개남과 만나고자 순창 피노리에 숨어 있다가 정읍 사람 김경천의 밀고로 이곳 사인 한신현.김영철.정창욱이 모은 민정에 의해 체포되다. '순무선록진담록' '순무사정보첩'
12월 9일 전라감사가 전봉준을 잡아 중앙으로 올리다. '갑오실기'
1895년
3월 29일 전봉준이 사형선고를 받고 이날로 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과 함께 사형당하다. '전봉준판결선원본'
창의문(倡義文)
세상에서 사람을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대문이다. 군신부자은 인륜의 가장 큰 것이라.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자식이 효도한 후에야 비로소 집과 나라를 이루어 능히 무궁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인효자애하고 신명성예하시니 현명하고 어질며 정직한 신하가 보좌하여 정치를 돕는다면, 요순의 교화와 문경의 정치를 가히 해를 보는 것처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신하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한갓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아첨과 아양을 부려 충성된 선비의 간언을 요망한 말이라 하고 정직한 신하를 일러 비도라 하니, 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에게 사납게 구는 관리가 많아서 백성들의 마음이 날로 더욱 나쁘게 변해가고 있다. 안으로는 삶에 즐거움이 없고 밖으로는 보호할 방책이 없다. 학정은 날로 커가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여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수가 드디어 무너져 하나도 남지 않았다.
관자가 이르기를, "예의염치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 했는데,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도 더 심하다. 공경 이하로 방백 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않고 한갓 자기 몸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것만 생각하여, 사람을 뽑아 쓰는 곳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보고 과거 보는 곳을 교역하는 저자거리로 만들었다. 허다한 뇌물은 나라의 창고에 넣지 않고 도리어 사사로이 저장하였다. 나라에 쌓인 빚이 있는데도 이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란하게 놀면서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바가 없으니 온 나라가 어륙이 되고 만민이 도탄에 빠졌다. 수령들이 재물을 탐하고 사납게 구는 것이 까닭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곤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쇠잔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밖에 향제를 세우고 오직 혼자만 온전하려는 방책에 힘쓰면서 녹봉과 지위만 도둑질하고 있으니, 어찌 옳은 이치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에 버려진 백성이나 임금의 땅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임금이 주신 옷을 입고 있으나, 가히 앉아서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온 나라가 마음을 같이 하고 억조창생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이제 의기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죽고 사는 맹세를 하노니, 오늘의 광경은 비록 놀라운 일이나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움직이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하여 함께 승평한 일월을 빌고 모두 성상의 덕화를 바랐으면 천만다행이겠놀.
갑오 삼월 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