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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산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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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 의병장의 묘소가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산3-1 회문산 회문봉 정상에 있다고 했지만, 탐방했을 때 찾을 수 없었다. 한협우님이 임병찬 의병장 묘소를 찾아서 나에게 찍어보내준 것이다. 친구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원래 임병찬의병장의 묘소는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산276-1 창의유적지에 있었다가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장을 한 것이다.
여러 정보와 탐방한 친구의 이야기, 위성지도를 참조하여 추정 GPS좌표를 구할 수 있었다. GPS좌표는 35.504142,127.105250°으로 추정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昔宋之文山不死於五坡被執之日而死於柴市我國之三學士不死於南韓係累之日而死於...
大韓光武紀元六十七年癸酉閏四月(대한광무기원67년계유 윤 4월)
작은지붕 정상에도 임병찬의병장 묘소 안내판이 서 있다. 큰지붕과의 거리는 100m이고.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산3-1 회문산 회문봉 정상에 있다는 임병찬의병장 묘소를 찾으러 갔을 때의 사진이다.
回文山自燃休養林(회문산자연휴양림)
노령문. 순창군과 임실군의 경계인 갈재(354m)에서 유래한 노령산맥줄기에 위치한 회문산은 지형적인 요새로 구한말 면안 최익현선생을 중심으로 양윤숙,임병찬선생의 의병활동의 근거지였고, 6.25전란 전후 빨치산 활동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안고 전북도당 유격사령부 자리와 임시 간부학교였던 노령학원터가 남아있다. 원래 회문산의 입구인 큰 문턱바위를 출렁다리와 연결하여 휴양림개설당시 출입문을 축조 노령문이라 이름 지었음.
임병찬 의병장의 묘소가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산3-1 회문산 회문봉 정상에 있다고 했지만, 탐방했을 때 찾을 수 없었다. 한협우님이 임병찬 의병장 묘소를 찾아서 나에게 찍어보내준 것이다. 친구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친구의 탐방로는 큰지붕을 먼저 탐방하고 작은지붕방향으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임병찬 의병장의 묘소는 원래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상종성에 있었지만 후손들이 회문산 정상 바로 아래로 오래 전에 이장했다.
이곳 회문산 헬기장에서 회문봉까지는 약 900m. 회문봉 100m전 쯤 우측에 임병찬 장군의 묘소가 있다는 것과.
능선에서 약 20-30m우측이고, 묘 앞에 아래 그림과 같은 상석이 있다는 실마리로 찾았었다.
이곳 회문산 헬기장에서 회문봉까지는 약 900m. 회문봉 100m전 쯤 우측에 임병찬 장군의 묘소가 있다는 것과.
능선에서 약 20-30m우측이고, 묘 앞에 아래 그림과 같은 상석이 있다는 실마리로 찾았었다.
안내판도 설치되었다고 한다. '임병찬 의병장 묘'
임병찬 의병장 묘소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병오창의(丙午昌義)를 하여 회문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였던 임병찬 의병장의 묘소이다.
임병찬 선생의 본관은 평택, 호는 돈헌으로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조선 철종 2년인 1851년 음력 2월 5일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군사모집과 훈련, 군량비 조달 등의 책임을 맡아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을 점령하고 관곡을 취해 군량을 확보하여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6월에 순창객사에서 최익현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 황태자 가례 기념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재차 거사를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듬해에는 독립의군부의 노선, 조직, 활동 등을 구상하여 정리한 '관건'을 작성하여 고종의 재가를 받았다. 그 후 1914년 2월에는 이명상, 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 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선생은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 강제 병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 대중에게 국권 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제를 축출하려는 항일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14년 5월 일제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이하 관련자들이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체포된 후 옥중에서 3차례의 자결 시도와 단식으로 투쟁을 하다가 1914년 6월 거문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16년 음력 5월 23일 거문도 유배지에서 66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면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사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직계 친손들이 순창군의 협조를 받아 전면 부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병오창의(丙午昌義)를 하여 회문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였던 임병찬 의병장의 묘소이다.
임병찬 선생의 본관은 평택, 호는 돈헌으로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조선 철종 2년인 1851년 음력 2월 5일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군사모집과 훈련, 군량비 조달 등의 책임을 맡아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을 점령하고 관곡을 취해 군량을 확보하여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6월에 순창객사에서 최익현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 황태자 가례 기념으로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재차 거사를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듬해에는 독립의군부의 노선, 조직, 활동 등을 구상하여 정리한 '관건'을 작성하여 고종의 재가를 받았다. 그 후 1914년 2월에는 이명상, 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 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선생은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 강제 병합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 대중에게 국권 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제를 축출하려는 항일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14년 5월 일제 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이하 관련자들이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체포된 후 옥중에서 3차례의 자결 시도와 단식으로 투쟁을 하다가 1914년 6월 거문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16년 음력 5월 23일 거문도 유배지에서 66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면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사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직계 친손들이 순창군의 협조를 받아 전면 부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원래 임병찬의병장의 묘소는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산276-1 창의유적지에 있었다가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장을 한것이다.
그곳에는 현재 당시의 구 묘비가 남아있다.
그곳에는 현재 당시의 구 묘비가 남아있다.
大韓獨立義軍元帥部司令(대한독립의건원수부사령)
總將遯軒林先生之墓乾坐(총장돈헌임선생지묘 건좌)
임병찬의병장 창의유적지에 있는 구 묘비와 같은 묘비를 새롭게 만든것으로 보인다.
總將遯軒林先生之墓乾坐(총장돈헌임선생지묘 건좌)
임병찬의병장 창의유적지에 있는 구 묘비와 같은 묘비를 새롭게 만든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