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산115
- 탐방로그
-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의 묘는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산115 개암사 주차장 옆에 위치해 있다. 김기병 선생의 묘소 옆에는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김기병 행적비도 함께 찾아볼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기병은 부안(부령)김씨 김두회의 차남으로 1831년 1월 21일 부안군 상서면 내동마을에서 탄생, 유년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의지가 강직하면서도 우국충정이 충만한 인격으로 성장하였고 결혼 후 미개발된 상선마을에 이주, 광범위한 농지개발로 크게 번창하여 부안 군내의 유수한 농사 재벌이 되었다. 당시는 조선말 개화기로 외세의 침략과 수탈이 극심하고 국내적으로 누적된 부정부패, 매관매직, 탐관오리의 횡포 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었으며 이러한 국가 사회의 비극상에 비분강개하던 김기병은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보국안민" 등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추진하자 결연히 동참하여 부안 기포 두목이 된 후 정열적으로 의기투합한 농민들을 설득 취합하여 부안농민혁명군을 조직하고 부안 변산 해창에 있었던 국방용 무기고를 접수하여 농민군을 무장시킨 후 우덕동 앞 들에서 무기사용법을 훈련시켜 주민들로부터 환호와 경탄을 받았다.
.1894년 4월 1일 부안군 하서면에서 500여명의 농민군으로 조직을 확장하여 지휘하며 부안성을 무혈 함락하고 백산성 총집결에 참여 전봉준 장군과 합세한 후 4월 7일 황토현 전투, 4월 27일 전주성 함락, 10월 21일 우금치 전투 등 모든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과 함께 하였으나 구체적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동학군은 관군의 체포와 총살대상이 되었으나 김기병과 생존부하 동학군은 굴하지 않고 부안에 잠입, 지하농민혁명 운동을 계속하다가 주민의 밀고로 관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부하 8명과 함께 1895년 2월 10일 부안읍 동문 밖 형장에서 향년 65세로 처형되었다.
.국가에서는 봉건제도의 개혁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수호를 위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이를 계승 발전시켜 민족 정기를 선양할 목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3.5. 법률 제 7177호) 제정으로 본인의 명예회복 및 손자녀까지 국가 유공자 유족으로 결정하였고 이어 2007년 1월 26일 법률 제 8277호에 의거 고손자녀까지 확대하여 국가 유공자 유족으로 결정하였다.
.1894년 4월 1일 부안군 하서면에서 500여명의 농민군으로 조직을 확장하여 지휘하며 부안성을 무혈 함락하고 백산성 총집결에 참여 전봉준 장군과 합세한 후 4월 7일 황토현 전투, 4월 27일 전주성 함락, 10월 21일 우금치 전투 등 모든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과 함께 하였으나 구체적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동학군은 관군의 체포와 총살대상이 되었으나 김기병과 생존부하 동학군은 굴하지 않고 부안에 잠입, 지하농민혁명 운동을 계속하다가 주민의 밀고로 관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부하 8명과 함께 1895년 2월 10일 부안읍 동문 밖 형장에서 향년 65세로 처형되었다.
.국가에서는 봉건제도의 개혁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수호를 위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이를 계승 발전시켜 민족 정기를 선양할 목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3.5. 법률 제 7177호) 제정으로 본인의 명예회복 및 손자녀까지 국가 유공자 유족으로 결정하였고 이어 2007년 1월 26일 법률 제 8277호에 의거 고손자녀까지 확대하여 국가 유공자 유족으로 결정하였다.
優齋 扶寧 金公 基炳 之墓(우제 부령 김공 기병 지묘)
우제공 묘표
공의 휘는 기병이요 자는 내홍이며 호는 우제로 부령 김씨다. 선계는 신라 경순왕 태자로 고려 문정공 휘 구는 도덕과 문장이 뛰어나 후학들이 지포선생이라 칭하고 도동서원에 주향되고 한성 소윤 세영은 15대조이고 첨중추성필은 7대조이며 부호군지혁은 6대조이고 조는 낙선이며 고는 두회이다. 순조 신묘 정월 21일 공이 부안 상서내동에서 출생하다.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준수하며 천성이 온순하고 효친위선하며 우국충정이 비범하다.
공의 휘는 기병이요 자는 내홍이며 호는 우제로 부령 김씨다. 선계는 신라 경순왕 태자로 고려 문정공 휘 구는 도덕과 문장이 뛰어나 후학들이 지포선생이라 칭하고 도동서원에 주향되고 한성 소윤 세영은 15대조이고 첨중추성필은 7대조이며 부호군지혁은 6대조이고 조는 낙선이며 고는 두회이다. 순조 신묘 정월 21일 공이 부안 상서내동에서 출생하다.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준수하며 천성이 온순하고 효친위선하며 우국충정이 비범하다.
한말 개화 무렵 사직의 기강이 문란하여 탐관오리가 방호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며 봉건전제의 부패상이 극에 이르니 공이 비분강개하던 차 갑오년 민초의 선구자 전봉준이 제폭구민 보국안민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니 공이 결연히 동참하여 부안 기포의 한 두목이 되다. 공은 군졸을 지휘 변산 해안의 군기고를 접수하여 혁명군의 무장을 강화하고 전투훈련으로 사기를 앙양시켜 동년 4월 부안현의 함락에 크게 공헌하고 혁명군의 백산총집결및 출진에 합세하다. 군은 승승장구하여 호남을 석권하며 북상하던 중 침략야욕의 왜군 개입으로 동년 11월 공주 우금치 대접전에서의 처절한 패퇴 후에 해산되고 그 주장들은 왜군에 체포되어 처형되다. 공 역시 끝내 굴하지 않고 항거하다 부안읍 동문 밖 총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니 을미년 2월 10일 향년 65 오호통재라.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성을 어찌 잊으랴. 혁명좌절의 비탄은 구천에 사무치고 반역이란 누명은 반세기에 이르니 후손들 또한 무리(霧裏)에 살다가 민주조국 광복과 함께 동학인의 명예가 회복되니 만시지탄이나 공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여 그 개요를 이 비에 각자하여 영원한 후세에 전하노라. 묘는 개암동 월정 입구 대마등 진좌 배 창녕조씨 윤성녀 순조 신묘생 고종 병신 12월 21일 종 향년 66 묘는 장전 후 거적산 동울 임좌자에 한봉 한장 낙준이며 손에 형술 맹술 정술 복술 만술 병술 성술 귀술 관술이요, 그 다음 가계별로 약간명을 기록하면 증손에 형석 형택 형호 형연
형인이요, 현손에 종철 정철 영철 수철 순철 강산이라. 여번불록하다.
서기 1993년 계유 춘3월 한국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 이사 박용익 근찬 장흥 고광준 근서
서기 1993년 계유 춘3월 한국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 이사 박용익 근찬 장흥 고광준 근서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산115 개암사 주차장 옆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제 기병의 묘와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김기병 행적비를 찾았다.
동학 농민 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의 묘 입구 2km
개암사 입구 주차장 맞은편이다.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 행적비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 행적비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우제 김기병 행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