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동학농민군 순국 터, 부안읍성 남문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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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200-1
탐방로그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200-1 시계탑에 있는 남문 밖 부안 동학농민군 순국지 동학농민혁명유적지 안내판을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부안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 부안 동학농민군 순국 터, 부안읍성 남문 밖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조선 시대 공개 처형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서 집행하였다. 중한죄를 지으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형하는 것[不待時斬]'과 먼저 처형한 뒤에 보고한다는 선참후계(先斬後啓)를 적용하였다. 따라서 부안에서의 공개 처형은 부안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장소, 즉 부안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취원루(聚遠樓) 또는 후선루(候仙樓)라 부르는 남문 밖이었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의 첫 번째 희생자는 노대규(盧大圭)와 노입문(盧入文)으로, 1894년 12월 29일(음력) 정부군의 총살로 순국하였다. 이듬해(1895) 1월 12일에는 주산면 홍해 마을의 박문표(朴文表), 도산 마을의 김봉보(金奉甫), 그리고 송성구(宋成九)가 남문 밖에서 순국하였다. 한 달 뒤 2월 12일에는 남문 밖에서 9명이 순국하였고, 열흘 뒤 22일에는 7명이 순국하였는데, 장소는 무론 이름마저 알 수 없다. '호남의 대괴(大魁)'로 불리던 김석윤(金錫允.김영조)이 순국한 것은 3월 18일이지만 장소는 알 수가 없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뒤 순국한 부안 사람으로 확인된 숫자는 22명이지만, 이름이나마 확인된 인물은 6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16명은 신원조차 알 수 없다. 12명의 순국 장소는 남문 밖으로 전하지만, 이외는 장소마저 알 수 없다. 이와 함께 부안 읍성의 동문 밖에서도 처형이 자행되았으며, 전남 나주로 끌려간 30여 명이 그곳에서 순국하였다는 말이 전한다.
카이로스 광장 - 카이로스(Kairos) 본전통 시계탑 광장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200-1 시계탑에 있는 남문 밖 부안 동학농민군 순국지 동학농민혁명유적지 안내판을 찾았다.
"시간을 잇다" - Design motive: 부안군의 액운과 재난을 막아주던 당간지주의 의미를 담다. 당간지주 + 시계탑 + 버팀목, 자연
'부안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시계탑" 조형물' - 보안의 유형문화재인 당간지주를 모티브로 부안읍의 중심가에 있던 (구)시계탑을 현대적으로 재현하였다. 부안군의 액운과 재난을 막아주던 당간지주의 의미와 문화의 장이었던 부안읍의 중심가가 활성화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으며, 부안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매개체로서 부안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부안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 부안 동학농민군 순국 터, 부안읍성 남문 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