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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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8-1
탐방로그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 8-1 백산창의비가 있는 백산산성에 백산대회 개최지 동학농민혁명유적지 백산유적지 안내판이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동학농민혁명 백산창의비 뒤로는 동학정(정자)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동학혁명창의비문
이 곳 백산은 1894년 동학혁명군의 첫 지휘소가 설치되고 혁명군이 총집결했던 곳이다. 19세기말 안으로는 봉건적인 모순이 국도에 달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이 가중되고 있을때 이러한 반봉건 반외세 투쟁으로 총궐기하였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이 중심이 된 동학혁명군 지휘부는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의기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동학군은 손에 손에 죽창을 들고 이곳 백산에 모여들어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座則竹山立山立則白山)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백산에서 출발한 동학군은 호남을 석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여 우리나라 근대민족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한 획을 긋기에 이르렀다. 이에 역사적 고장인 이곳 백산에 그 기념비를 세워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1989년 11월 15일
이곳에는 예전에도 안내판이 있었는데 내용이 바뀌었다.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백산대회
백산대회: 부안 백산은 한국 근대사의 분수령을 가르는 대사건으로 평가받는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의 현장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고부의 동학교도와 농민은 1893년 11울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결의하고, 이듬해(1894년) 1월 10일에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 이후 무장기포를 거쳐 1894년 3월 26일(양력 5월 1일), 호남일대에서 모인 구눙이 야트막한 백산에 집결하였다. 그 수는 전라도 34개 지역에서 모인 8천여 명으로 전하는데, 이를 두고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 이라고 하였다. 백산에 모인 군중은 지휘부를 비롯한 혁명군을 조직하고, 봉기의 대의와 지향하는 바를 밝힌 '백산 격문', 강령에 해당하는 '사대 명의',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 군율'을 선포하였다. 이로서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세상에 알렸다. 백산을 택한것은 '백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만한 땅'이라는 비결이 전하는 길지라는 점, 군량확보가 용이한 곡창지대라는 점, 전략적 용충지일 뿐 아니라 사통팔당의 교통의 요지라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1894년 당시 고부 백산이 1914년 일본강점기에 부안 백산이 되면서 한때 백산대회는 잊혔지만, 동학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 기념일 제31호로 지정되었고, 1998년 9월 17일 국가문화재 사적 제409호로 승격되었다.

동학농민군 편제
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 김개남
총참모 김덕명, 오시영
영솔장 최경선
비서 송희옥, 정백현

격문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구하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강폭한 도적의 무리를 쫒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과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가.
갑오 정월 17일
호남창의소 재 고부 백산

4대명의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생물을 함부로 잡아먹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라.
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처들어가 권귀를 모두 없앤다.

12개조 군율

1. 항복하는 자는 따뜻하게 대한다.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 탐학한 자는 쫒아낸다.
4. 따르는 자는 존중한다.
5. 굶주린 자는 먹여준다.
6.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
7. 도주하는 자는 쫒지 않는다
8. 가난한 자는 진휼한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10. 거역하는 자는 타이른다.
11.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12. 불효자는 처벌한다.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백산대회.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일어서면 백산(白山)이라.


백산대회와 동학군
동학인 4천여 명이 남쪽에서 다시 고부 백산에 와서 모였다고 1894년 3월 25일(양력 4월 30일)
동학군이 어제(26일) 백산으로 이진하였고, 금일에는 본 읍에 들어왔다고 한다. 도소봉(현 부안군 행인면 진동리 승암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봤지만 거취를 알 수가 업성ㅆ다. 그래서 바로 내려왔다..중략..동학군은 전주를 향해 나아갔다고 한다. 1894년 3월 27일(양력 5.2일)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 8-1 백산창의비가 있는 백산산성에 백산대회 개최지 동학농민혁명유적지 백산유적지 안내판이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부안 백산성 / 사적 제409호 / 백산면 용계리
동진강이 주변에 감싸는 야산에 위치한 이 백산성은 산 윗부분을 테를 두른 것처럼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건물을 짓기 위해 쌓았던 축대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삼국지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도 발견된다. 백산지역은 백제의 왕자 부여 풍이 백제의 유민들과 함께 나.당 연합군을 상대로 백제의 부흥운동을 전개할 때, 일본의 구원군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백산성은 또 조선 고종 31년(1894) 3월,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혁명의 불길을 당겼던 곳으로, 우리나라 근대사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東學革命 白山倡義碑(동학혁명 백산창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