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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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803-1
탐방로그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803-1에 위치한 이병렬(이장춘)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와 기념비는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병렬(이장춘) 선생은 20세의 젊은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200여 병졸을 거느리면서 ‘싸우다 죽을뿐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그것만이 떳떳한 일이다.’라고 부하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병렬 의병장의 기적비와 묘소
의병장 원주이공 장춘 기적비
이장춘(일명 병렬)공은 작성원주 이씨요 려말관중랑장으로 오절수의하야 음약단설로 순사하신 휘 계주 호 송헌선생의 6세손 휘 여공께서 입 무주하여 누대하야 고는 연근이고 비는 평산신씨로서 1888년 1월 무풍면 은산리 속동에서 송헌공의 16세손으로 출생하셨다.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강지 의협심이 강하였다. 오호라 구한말 일제의 침략으로 국위누란에 마침내 1905년 치욕적인 을미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에는 군대까지 해산되게 이르니 국내도처에서 분기의병하야 거적하나 공도 기일원으로 분기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장으로 덕유산을 보거로 국권회복
의 일념으로 동분서주투쟁하였다. 1906년에는 주로 무주, 진안, 장수들지의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왜병을 무수히 살섬하고 습격하여 소각하고 여력을 몰아 무주경찰서를 급습하여 많은 무기를 ?획하였다. 그 연말에는 경남 안의로 옮겨 익년 5월까지 활약하다가 남원 리문리로 옮겨 왜헌병과 교전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해 8월에는 영남지구의병대장 문태서장군과 합세하여 영동, 옥천등지에서 활약하고 10월에는 이원역을 습격하여 왜병3명을 납치하기도 했다.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무풍면 현내리 문평에 돌아와 11월 대설하에 많은 적군과 대항하여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평소 망국의 한을 안고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기개로 살다 그의지대로 1907년 정미 11월 17일에 생을 마쳤다. 방년 20약관에 애국지사로 살신성인하니 전국민의 귀감이 되셨다. 건국후 1977년 12월에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으며 묘지는 무풍면 철목리로 신기앞산에 있고 그의 양손 광섭이 견석하고 창의비가 무풍면 철목리 풍호정에 있다. 그러나 빈약하여 다시 군수가 중심이 되어 견석조경으로 그 충절을 영구히 흠모하는바다. 대대손손 귀감이 될지어다.
하지만 철목리에 있다는 풍호정은 찾을수가 없었다.
전북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803-1
이병렬 의병장의 기적비와 묘소 묻고 물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