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78
- 탐방로그
- 이곳 광한루원에는 많은 사적비가 있다. 동학혁명유적비와 비석군에 있는 삼도토포사 김시풍 불망비(三道討捕使金始豊不忘碑)는 서로 반대편에서 전쟁을 한 사적비이다. 삼도토포사 김시풍 불망비(三道討捕使金始豊不忘碑)는 뒷줄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癸巳七月日左道右社褓商立(계사칠월일좌도우사보상립)
광한루의 뒷면 모습이다. 항상 앞면만 촬영했었는데..
광한루(廣寒樓) / 보물 제281호 / 전라북도 남원시
이 건물은 조선 시대 이름 난 황희 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 세종 26년(1444) 정인지가 건물이 전설 속의 달나라 궁전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닮았다 하여 광한루(廣寒樓)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후 선조 15년(1582)에는 정철이 건물 앞에 다리를 만들고 그 위를 가로질러 오작교라는 반월형 교각의 다리를 놓았다. 지금의 건물은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5년(1626)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북쪽 중앙의 층계는 점점 기우는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고종 때 만들었다.
이 건물은 조선 시대 이름 난 황희 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 세종 26년(1444) 정인지가 건물이 전설 속의 달나라 궁전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닮았다 하여 광한루(廣寒樓)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후 선조 15년(1582)에는 정철이 건물 앞에 다리를 만들고 그 위를 가로질러 오작교라는 반월형 교각의 다리를 놓았다. 지금의 건물은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5년(1626)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북쪽 중앙의 층계는 점점 기우는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고종 때 만들었다.
오작교(烏鵲橋)
오작교 위에서 바라본 광한루
남원시 천거동 78 광한루 비석군 삼도토포사 김시풍 불망비(三道討捕使金始豊不忘碑)를 찾았다.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광한루원
1960년대 광한루원 확장사업 이전에 광한루원의 호수 나목은 성밖시장(남원장)이었다. 동학의 교조 수은 최제우선생이 혹세무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1861년 겨울, 경주에서 피신차 남원에 들어와 광한루 오작교 주변 서형칠의 약방에 머물다가 공창윤의 집을 거쳐 교룡산성 내 덕밀암으로 옮겨 은적암이라는 현판을 걸고 경전 집필과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호남에 동학이 전파 된 시초다. 서형칠약방은 광한루원 경내인 완월정 앞 호석 근방으로 추정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음) 11월 28일 전라좌도 농민군이 민보군과 일본군에 잡혀 처형되었는데 대부분의 농민군들이 성밖시장 저자거리에서 참살당하였다. 그 위치는 광한루원 정문에서 본 잔디광장 시작 지점 부근이다.
1960년대 광한루원 확장사업 이전에 광한루원의 호수 나목은 성밖시장(남원장)이었다. 동학의 교조 수은 최제우선생이 혹세무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1861년 겨울, 경주에서 피신차 남원에 들어와 광한루 오작교 주변 서형칠의 약방에 머물다가 공창윤의 집을 거쳐 교룡산성 내 덕밀암으로 옮겨 은적암이라는 현판을 걸고 경전 집필과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호남에 동학이 전파 된 시초다. 서형칠약방은 광한루원 경내인 완월정 앞 호석 근방으로 추정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음) 11월 28일 전라좌도 농민군이 민보군과 일본군에 잡혀 처형되었는데 대부분의 농민군들이 성밖시장 저자거리에서 참살당하였다. 그 위치는 광한루원 정문에서 본 잔디광장 시작 지점 부근이다.
이곳이 앞서본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유적비에서 설명한 동학군이 참살당하였던 곳.
이곳 광한루원에는 많은 사적비가 있다. 조금 전 주차장에서 본 동학혁명유적비와
비석군에 있는 삼도토포사 김시풍 불망비(三道討捕使金始豊不忘碑)는 서로 반대편에서 전쟁을 한 사적비이다.
이곳 광한루원에는 많은 사적비가 있다. 조금 전 주차장에서 본 동학혁명유적비와
비석군에 있는 삼도토포사 김시풍 불망비(三道討捕使金始豊不忘碑)는 서로 반대편에서 전쟁을 한 사적비이다.
비석군(碑石群)
이곳 비석은 과거에 남원과 인연을 맺은 부사(府使), 관찰사(觀察使), 어사(御史)들의 사적비(事蹟碑) 및 선정비(善政碑) 등이다. 예전에는 남원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소실과 훼손을 방지하고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비석의 제작 연대가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하여 남원의 역사와 비석 형식의 변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곳 비석은 과거에 남원과 인연을 맺은 부사(府使), 관찰사(觀察使), 어사(御史)들의 사적비(事蹟碑) 및 선정비(善政碑) 등이다. 예전에는 남원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소실과 훼손을 방지하고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비석의 제작 연대가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하여 남원의 역사와 비석 형식의 변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삼도토포사 김시풍 불망비(三道討捕使金始豊不忘碑)는 뒷줄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었다.
三道討捕使金公始豊永世不忘(삼도토포사 김공시풍 영세불망)
三道討捕使金公始豊永世不忘(삼도토포사 김공시풍 영세불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