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춘의동 산76
- 탐방로그
- 박천규 선생의 묘소는 1999년 11월 2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2묘역 794로 이장되었다. 다만 탐방했을 당시, 묘의 봉분과 묘비가 그대로 있고 벌초를 하지 않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박천규 애국지사께서는 이곳에서 이장되어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2묘역794에 계신다.
다만 묘의 봉분과 묘비가 그대로 있고 벌초를 하지 않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만 묘의 봉분과 묘비가 그대로 있고 벌초를 하지 않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사진으로 볼 때는 작은 묘비로 보였는데, 매우 크고 정성스럽게 건립한 훌륭한 묘비였다.
小窩 先生 竹山 朴公 天圭 墓(소와 선생 죽산 박공 천규 묘)
小窩 先生 竹山 朴公 天圭 墓(소와 선생 죽산 박공 천규 묘)
박천규 선생은 신라 경명왕 제4자인 죽산군 휘 왕 언립의 후예로 1902년 11월 17일 평북 선천에서 부친 박병일씨와 모친 수안계씨의 장남으로 태여나시다. 여덟살에 조국을 일본에 빼앗긴 선생은 어려서부터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깊이 품어오다가 3.1운동 당시 겨우 18세인 오산학교 재학생의 몸으로 조국을 건지고자 상해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귀국 중이던 파산 박병익 선생과 함께 비밀결사인 선천청년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
시키다가 일제 관헌에 체포되여 반년간의 옥고를 치르셨다. 출옥 후에는 휘문고보와 경성제국대학의학부를 졸업함과 동시에 모교인 오산학교 교단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끊임없이 깨우쳐 오시다가 1943년에는 동지 박건채. 박희병, 이근칠, 제씨와 함께 또다시 옥고를 겪으시다. 조국 광복 후에는 의업에 종사하시며 민족중흥을 꾀하시고 흥사단과 오산학교를 통해 항시 정신적인 지도를 전념해 오셨는데 1950년에 6.25 사변이 터지자 선생은 공군에 솔선 입대하시여 공군병원장과 의무감을 역임하시면서 초창기의 공군발전에 많은 공훈을 남기셨다. 1960년에 제대하신 뒤에는 국민 보건에 진력하면서 다시 흥사단과 오산학교를 도와오시다가 1967년 10월 24일에 별세하시니 향년은 66세요, 슬하에 2남 6녀를 두시다. 선생은 천성의 성품이 청렴결백하시어 항상 청빈 속에서 조국 광복과 민족중흥에만 온갇 힘을 기울여오시므로써 전 생애를 겨레의 귀감으로 살아오셨으니 이제 선생의 육신은 가셨다 하되 그 고매하신 정신은 이 겨레와 더불어 영원히 살아계시다.
서기 1968년 4월 5일
정비석 찬
계화순 서
서기 1968년 4월 5일
정비석 찬
계화순 서
1980년 8월 14일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 받음
자 종갑 종을, 녀 종화, 서 임태제, 녀 종숙, 서 백은균, 녀 종미 종경 종란 혜련
자 종갑 종을, 녀 종화, 서 임태제, 녀 종숙, 서 백은균, 녀 종미 종경 종란 혜련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부천시 춘의동 산 76번지이다.
경기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산울림청소년수련관 아래 밤골 공동묘지 애국지사 박천규(朴天圭)의 구 묘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