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신촌동 산29
- 탐방로그
- 이태현 선생 추모비는 동림사 입구 들어가는 길, 동림교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이 장소의 GPS상의 주소는 전북 남원시 신천동 417이다. 애국지사 추모원 내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동림사 입구 들어가는 길에 있는 이태현 선생 추모비, 독립유공애국지사 추모비를 찾아왔다.
동림교 바로 앞에 있었다. GPS상의 주소는 전북 남원시 신천동 417이다.
순절의사 정암 이공태현추모비
공은 남원군 주생면 부동리에 거주한 전주이씨 성령대군의 후손 회언의 3대독자로 일찍이 흠재 최병심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리에 정통하고 천성이 강직하여 백절불굴의 기품이 과인하였다.
망국의 한과 배일사상이 만공했던 공은 삭발, 창씨 개명등 왜정이 날로 포악하여지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등 남원성 함락의 통분과 경술국치를 크게 꾸짖는 수왜십죄 죄문을 각처에 유포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던중 왜경의 심지로 강포 호소를 받기에 이르렀다. 공은 피체되느니보다 정정당당하게 대결할것을 다짐하고 주생주재소에 찾아가 그들의 죄상을 논박하다가 폭동이라고 부르면서 포박하려던 왜경을 려성질책하며 내가 너희들에게 곤욕을 당하기보다 차라리 깨끗이 자결하여 우리 삼천만 민족의 숙괴를 표명하리라하고 비수를 꺼내어 자문하였다.
단번에 동맥이 끊어지지 않으니 선혈을 왜경에게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두번, 세번 거듭 혈맥을 잘라 자결하였으니 때는 민국 24년 임오년(1942) 5월 23일이었다.
호생 오사는 온 천하의 상징이기로 국록을 먹던 세도가들도 감히 못하던 살신성인의 의로를 포의한 자로서 33세를 일기로 애석한 청춘
망국의 한과 배일사상이 만공했던 공은 삭발, 창씨 개명등 왜정이 날로 포악하여지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등 남원성 함락의 통분과 경술국치를 크게 꾸짖는 수왜십죄 죄문을 각처에 유포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던중 왜경의 심지로 강포 호소를 받기에 이르렀다. 공은 피체되느니보다 정정당당하게 대결할것을 다짐하고 주생주재소에 찾아가 그들의 죄상을 논박하다가 폭동이라고 부르면서 포박하려던 왜경을 려성질책하며 내가 너희들에게 곤욕을 당하기보다 차라리 깨끗이 자결하여 우리 삼천만 민족의 숙괴를 표명하리라하고 비수를 꺼내어 자문하였다.
단번에 동맥이 끊어지지 않으니 선혈을 왜경에게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두번, 세번 거듭 혈맥을 잘라 자결하였으니 때는 민국 24년 임오년(1942) 5월 23일이었다.
호생 오사는 온 천하의 상징이기로 국록을 먹던 세도가들도 감히 못하던 살신성인의 의로를 포의한 자로서 33세를 일기로 애석한 청춘
을 마쳤건만 드 누구도 쉽게 따를 수 없었던 그 위국장거가 연륜이 기듭됨에 따라 적한 하게도 묻혀가는것을 애달프게 생각하는 인사들이 여기 공의 애국정혼을 높이 추모하고 그 위적을 현각하여 후세에 영전키로 한것이다. 공의 가적미행은 산과 같이 쌓였어도 일오석면이 용남지 않기에 이만 줄이나 공의 위적은 향토와 더불어 길이 빛나리라.
서기 1972년 10월 10일
남원교육감 김한섭
서기 1972년 10월 10일
남원교육감 김한섭
○리기 흥하고 ○하는 동기는 옛적부터 그나라의 운명이라고 말할수 있거니와 융희년간의 경술국치야 어찌 이러한 표현에 비견할수 있으리오 삼천리 강산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키고 있었겄만 삼천만 온겨례들은 정혼마져 사위워가고 있던 왜정말엽이라 나라를 근심하는 자 많다하여도 비분만을 머금을뿐 능히 항쟁에 나설사람이 희귀하던때 우리 남원출신 정암이공태현의사는 조국광복을 위한 민족정기를 환기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옆에 많은 비석들이 서 있었다.
선무원종공훈 남원양공 응원 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