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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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산59-1
탐방로그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산 59-1 오리정휴게소 맞은편 애국지사 이석기의 구 묘비, 애국지사 선덕비를 찾았다. 이석기 선생의 묘소는 2003년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面長 李奭器 施惠碑(면장 이석기 시혜비)
面長 李公 奭器 施惠碑(면장 이공 석기 시혜비)
愛國志士 梅湖 全州李公 奭器 之墓(애국지사 매호 전주이공 석기 지묘)
애국지사 매호 석기 공은 세종왕자 영해군 14대손인 휘 교협과 양주허씨를 고비로 3형제 중 막내로 1879년 11월 14일 남원군 이매면 대신리에서 태어났다. 장형은 현기 중형은 홍기이다. 공은 학식이 풍부하고 도량과 지용이 겸비한 인물이다. 공이 31세되던 1910년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이 강행되니 망국의 한과 항일투쟁의 뜻을 간직한 채 왜의 통치하에 공은 면장직에 있으면서 면민들에게 기회있는대로 민족 자주성을 주지시켰다. 공이 41세되던 1919년 3월 1일 손병희 선생 등 33인의 독립선언문을 반포하고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자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공은 때가 왔음을 자각하고 친질 광수를 경
성에 보내 동경 유학생 대표 송팔용의 주선으로 오세창 등 요인과 면담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지시와 독립선언문을 지참 귀향하여 상세히 현황을 보고받은 공은 이를 근거로 친족과 동지를 규합 거사에 대하여 세밀한 계획을 세웠다. 1차는 덕과 이매면민을 동원하고 2차는 남원읍에서 전군민을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각부서를 정하고 임무를 부여하였다. 공은 거사에 따른 준비를 갖추고 3월 31일 면장직을 사직한 공은 군내 17개면과 산서 지소 오수 등면장에게 거사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격문을 작성 동지 편에 배부하고 운동에 동원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4월 3일 식수기념일에 이매면민 2백여명은 게명당 고개에서 도로 보수를 하게하는 한편 덕과면민 3백여명은 도화동 뒷산에서 식수를 하게 하였다. 작업을 마치고 귀가시인 오후 2시경 격문과 태극기를 나눠주고 공은 군중 앞에 서서 격문을 낭독한 후 태극기를 높이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군중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공은 선두에 서서 이매헌병분소로 향하였다. 한편 도로 보수하던 이매면민은 덕과면민들의 만세소리에 합창하여 합류 헌병분소를 습격하였다. 이에 당황한 왜병들은 남원헌병청에 연락 기병대가 긴급 출동하여 주동자인 공 외에 5명이 체포되어 남원으로 압송당하고 군중들은 총검으로 위협 강제 해상시켰다. 공은 압송당하면서 「여러분 우리는 비록 왜놈들에게 끌려가나 감방에서 계속 만세를 부를 것이요, 오늘의 독립운동을 전군민과 같이 합심 대한독립을 위하여 싸워주시오」라고 당부하였다. 검거되지 않는 동지들은 계획대로 범수 성기 두기 형기 등은 이튼날 남원장날을 이용 동원된 군민 천여명을 북시장 동서남북 사방향으로 각각 나누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청을 습격하고 애국동지들을 즉각 해방하라고 외쳤다. 이 의거에서 왜병들이 난사한 흉탄에 사망이 다수요, 부상자가 수십명이나 되었다. 이날을
전후 검거 투옥된 의사가 33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남원군 3.1운동을 주도한 공은 장년의 옥고 끝에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32년 8월 19일 54세를 일기로 영면하셨다. 공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남은 항수 병수 동수요 녀는 정순 정숙이며 주손은 풍삼 증손은 요셉이다. 공은 1963년 정부로부터 대통령포상을 추서했고 금반 정부의 지원으로 공의 애국충절을 후세만대에 기리고자 여기에 비를 세우고 공적을 새기는 바이다.
1985년 10월 초추 족제 이만기 근찬 종손 석홍 근서
격문
격문
아 동포 제군이여 신성한 단군의 자손으로써 반만년 동안 동방에 웅비하든 아 조선민족은 경술년이 원수이다. 금수강산은 식민지도에 출판되고 신성자손은 노예 민적에 들어갔다. 여사한 수욕을 수하고 하 면목으로 지하의 성조를 보겠느냐. 여하히하여 열강인을 대할고 몽고도 독립을 선언하고 파란도 민족자결을 주장한다. 자에 발분흥기하여 만강의 열성을 다하여 조선독립을 고창하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 만만세
매호 이석기
각 면장에게 보내는 서신내용

시유 기미오월이 동주하고 만국이 악수하여 세계평화의 서광이 조한지라 근유 첨위 귀체익익청목경하이외다. 각설우생이 십수년간 면장 재직 중 공사다양 애호하심은 진심난망야라. 연이현금 20세기 차시대는 문맹의 보무가 정지치 안이한지라 무로써 유하고 허로써 실하여 작일의 패자는 금일의 여자요. 석일의 패자는 현시의 강자라. 역사가 없는 저 몽고도 독립을 선언하고 미약한 저 파란도 민족자결을 주창하거든 신성손자 아 조선민족이랴. 자에 우생이 면장의 직을 사하고 만강진성을 다하여 조선독립을 고창합니다. 청컨대 첨군자는 불아하기하고 배가혜호 하심을 무망

조선개국 4252년 4월 3일 구 남원군 덕과면장 이석기 각 면사무소 귀중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산 59-1 오리정휴게소 맞은편 애국지사 이석기의 구 묘비, 애국지사 선덕비를 찾았다.
愛國志士 梅湖 全州李公 奭器 之墓(애국지사 매호 전주이공 석기 지묘)
애국지사 묘소 표시
이 비는 애국지사 매호 이석기 공의 면장 재직 당시 선덕비이다.
공의 묘소는 뒤편으로 50지점에 있음
손자 풍삼
1986년 3월 일

선생의 묘소는 2003년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面長 李公 奭器 施惠碑
(면장 이공 석기 시혜비)

面長 李奭器 施惠碑
(면장 이석기 시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