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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68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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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산66 동해골의 함성 기념탑 광장 남원3.1만세운동발상지기념탑을 찾아가고 있다.
이곳도 주소가 잘못되어 있어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곳의 GPS 상 주소는 산 번지가 아니고 그냥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68이다.
기미 남원 3·1만세운동 발상지 성역화 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9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전북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산66 동해골의 함성 기념탑 광장 남원3.1만세운동발상지기념탑을 찾아가고 있다.
이곳도 주소가 잘못되어 있어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곳의 GPS 상 주소는 산 번지가 아니고 그냥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68이다.
이곳의 GPS 상 주소는 산 번지가 아니고 그냥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68이다.
동해골의 함성
남원3.1만세운동발상지 기념탑.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기미년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가운데 남원 덕과면지역에서도 자주독립을 이루기위해 1919년 4월 3일 식수기념일을 기하여 당시 덕과면장 이석기, 조동선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경고, 아 동포제군이여!'라는 격문을 사율리에서 소리높여 낭독하고 남원~전주간 큰길로 나서서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탄압에 이석기, 조동선, 이풍기,이승순 등 많은 이들이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당하신 이석기 덕과면장등 수많은 순국선열 영령을 추모하고 남원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기념하고자 당시의 현장인 이 곳 덕과면 사율리 동해골에 남원3.1만세운동발상지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이곳 만세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하신 이석기면장외 38인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그 후손들에게 예우와 보상을 하고있다.
남원3.1만세운동발상지 기념탑.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1919년 기미년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가운데 남원 덕과면지역에서도 자주독립을 이루기위해 1919년 4월 3일 식수기념일을 기하여 당시 덕과면장 이석기, 조동선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경고, 아 동포제군이여!'라는 격문을 사율리에서 소리높여 낭독하고 남원~전주간 큰길로 나서서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탄압에 이석기, 조동선, 이풍기,이승순 등 많은 이들이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당하신 이석기 덕과면장등 수많은 순국선열 영령을 추모하고 남원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기념하고자 당시의 현장인 이 곳 덕과면 사율리 동해골에 남원3.1만세운동발상지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이곳 만세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하신 이석기면장외 38인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그 후손들에게 예우와 보상을 하고있다.
동해골의 함성 격문
아(我) 동포제군이여!
신성한 단군의 자손으로서
반만년동안 동방에 웅비하는 아 조선민족은 경술년이 원수이다.
금강산은 식민지도에 출판되 신성자손은 노예민적에 들어갔다.
여사한 치욕을 수하고 하면목으로 지하의 성조를 보겠느냐?
여하히 하여 열강을 대할고
몽고도 독립을 선언하고 파란도 민족자결을 주장하다.
자에 발분흥기하여 만강의 열성을 다하여 조선독립을 고창하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만세!
아(我) 동포제군이여!
신성한 단군의 자손으로서
반만년동안 동방에 웅비하는 아 조선민족은 경술년이 원수이다.
금강산은 식민지도에 출판되 신성자손은 노예민적에 들어갔다.
여사한 치욕을 수하고 하면목으로 지하의 성조를 보겠느냐?
여하히 하여 열강을 대할고
몽고도 독립을 선언하고 파란도 민족자결을 주장하다.
자에 발분흥기하여 만강의 열성을 다하여 조선독립을 고창하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만세!
독립유공자
동해골 만세운동
이석기, 이승순, 이병규(李秉圭), 김선양, 이재화(李載和), 김택두, 신봉순, 이병기(李丙器), 조동선, 이풍기, 이명원(李明源), 김광삼, 강응화, 신경화, 이석화
천도교인 유공자
이기원(李起元), 황동주, 김덕인, 황석현(黃錫顯), 문경록
조선독립 대동단
강경진, 한태현, 이범수, 형갑수,
계명당고개 만세운동
이형기(李炯器), 이용기(李龍器), 유창근(柳昌根), 정한익, 이성기, 김해근, 이명수, 이교준(남원),
그 외 유공자(덕과, 사매 출신)
이태수(李台壽), 김용식(金容湜), 진만조, 형광욱, 이대수, 김행즙, 소팔백
동해골 만세운동
이석기, 이승순, 이병규(李秉圭), 김선양, 이재화(李載和), 김택두, 신봉순, 이병기(李丙器), 조동선, 이풍기, 이명원(李明源), 김광삼, 강응화, 신경화, 이석화
천도교인 유공자
이기원(李起元), 황동주, 김덕인, 황석현(黃錫顯), 문경록
조선독립 대동단
강경진, 한태현, 이범수, 형갑수,
계명당고개 만세운동
이형기(李炯器), 이용기(李龍器), 유창근(柳昌根), 정한익, 이성기, 김해근, 이명수, 이교준(남원),
그 외 유공자(덕과, 사매 출신)
이태수(李台壽), 김용식(金容湜), 진만조, 형광욱, 이대수, 김행즙, 소팔백
동해골(도화곡)의 함성
동해골(도화곡)의 함성
1919년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폭발한 만세운동의 거센 물결이 남원에 이르는 것은 3월 2일 새벽 이기원 황헉현 황동주등의 천도교인들에 의해 교구장 유태홍애개 전달된 독립선언서가 남원의 요소요소에 개시되면서 부터였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백성들의 가슴에 한서린 서릿발이 맺힐 무렵인 그해 4월 3일 당시 덕과면 면장으로 있던 이석기님의 선도아래 남원에서도 드디러 자주독립을 향한 만세의 함성이 터지고야 말았다.
평소 항일의식이 강했던 이석기 면장은 남원에서도 만세운동의 횃불을 올릴 결심을 하고 친조카인 이광수를 서울에 보내어 3.1운동의 배경과 진행상황을 탐문해오게 하는 한편 3월 31일에는 덕과면 사무소에서 각 부락의 구장회의를 소집하였다. 마침 4월 3일은 식수기념일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눈을 피하여 군중을 모을 수 있는 좋은 괴회였다. 이석기면장은 구장회의에서 그날 집집마다 젊은 장정들이 동해골(도화곡)의 나무심기에 참석하도록 지시를 내린 다음 신양리 이병규 사율리의 이풍기 고정리 이명원등의 구장들을 남게하여 4월 3일 동해골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려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다행히 그 자리에 모인 구장들은 한사람의 반대도 없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뜻을 결의하였다. 그날부터 이석기 면장은 남원군내 각 면장들에게 보낼 독립만세참가취지서라는 취지문과 경고 아 동포제군 이라는 격문을 지어 대비했으며 구장들은 밤을 새워 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날 밤 이석기면장은 사매면에서도 같은 날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사매면 대신리 구장인 이형기를 비롯 이성기 이용기 이범수 이광수를 불러 덕과면의 만세운동을 설명하고 사매면에서도 만세를 부를 것을 의논한 결과 모두들 찬동했다. 이들은 곧 바로 사매면 대신리,관풍리,오신리 3개부락 구장들을 통해서 역시 4월3일 개명당고개에서 도로보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면민을 동원하여 덕과면 동해골과 동시에 만세의 함성을 터뜨리기로 약속을 했다.
드디어 4월 3일 덕과면민들은 나무를 심기위해서 동해골에 모였고 사매면민들은 도로보수를 하기위하여 계명당고개에 모였다. 오전에는 덕과면과 사매면민 모두가 열심히 나무를 심고 도로보수를 하는것으로 군중들의 모임을 철저히 위장했다. 이석기면장은 나무심기가 끝난 다음 비장한 얼굴도 면민들 앞에 서서 여러분 삼천리 방방곡곡에서는 지금 왜놈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고 우리도 다 함께 만세를 불러 빼앗긴 조국을 찾아야 합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미리 준비된 태극기가 나뉘어지고 5백여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동해골을 우렸다. 때를 같이하여 도로보수를 명목으로 계명당고개에 모여있던 사매면민 3백여 군중들도 동해골의 함성이 터지는 순간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한 마음이된 8백여 양쪽 면민들은 민족의 소망인 독립의 염원을 안고 성난 물결처럼 사매헌병주재소를 향해 나아가 조선은 조선사람의 땅이다. 왜놈들은 물러가라고 10년동안의 굴욕스런 삶에 대한 분노를 일시에 터뜨렸다. 이에 당황한 사매헌병주재소에서는 남원헌병청으로 연락을 하여 오후 6시경 완전무장한 한병들이 기마대와 자동차로 출동하여 내 나라를 찾겠다는 백의민족의 가슴에 총을 쏘아 주동자 이석기님을 비롯한 김선량 이재화 이승순 이풍기 조동선 등을 포박하여 갔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을 기어코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덕과와 사매면들의 불꽃같은 의지는 꺼질줄을 몰랐다. 이날밤 이서익를 중심으로 몇몇이 다시 모임을 갖고 다음날 태극기를 만들고 관풍리 구장 이교준 그리고 김해근 오신리구장 류창근 등은 각 부락을 돌면서 내일의 만세운동에 면민들이 많이 참석할 수 있도록 독려를 하였다. 4월 4일 오후 2시 남원의 북시장에 모인 2천여 군중들은 침략자 일제를 향해 나라를 잃은 백성들의 성난 울부지지음을 터뜨렸으니 동해골과 계명당 고개의 함성은 남원3.1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그날의 횃불이 동해골에 오른지 어언 79개 성상 대쪽같은 푸른 마음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선열들과 고귀한 넋을 기리고 교훈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고자 여기에 탑을 세우고 그 뜻을 새긴다. 1998년 8월
1919년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폭발한 만세운동의 거센 물결이 남원에 이르는 것은 3월 2일 새벽 이기원 황헉현 황동주등의 천도교인들에 의해 교구장 유태홍애개 전달된 독립선언서가 남원의 요소요소에 개시되면서 부터였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백성들의 가슴에 한서린 서릿발이 맺힐 무렵인 그해 4월 3일 당시 덕과면 면장으로 있던 이석기님의 선도아래 남원에서도 드디러 자주독립을 향한 만세의 함성이 터지고야 말았다.
평소 항일의식이 강했던 이석기 면장은 남원에서도 만세운동의 횃불을 올릴 결심을 하고 친조카인 이광수를 서울에 보내어 3.1운동의 배경과 진행상황을 탐문해오게 하는 한편 3월 31일에는 덕과면 사무소에서 각 부락의 구장회의를 소집하였다. 마침 4월 3일은 식수기념일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눈을 피하여 군중을 모을 수 있는 좋은 괴회였다. 이석기면장은 구장회의에서 그날 집집마다 젊은 장정들이 동해골(도화곡)의 나무심기에 참석하도록 지시를 내린 다음 신양리 이병규 사율리의 이풍기 고정리 이명원등의 구장들을 남게하여 4월 3일 동해골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려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다행히 그 자리에 모인 구장들은 한사람의 반대도 없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뜻을 결의하였다. 그날부터 이석기 면장은 남원군내 각 면장들에게 보낼 독립만세참가취지서라는 취지문과 경고 아 동포제군 이라는 격문을 지어 대비했으며 구장들은 밤을 새워 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날 밤 이석기면장은 사매면에서도 같은 날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사매면 대신리 구장인 이형기를 비롯 이성기 이용기 이범수 이광수를 불러 덕과면의 만세운동을 설명하고 사매면에서도 만세를 부를 것을 의논한 결과 모두들 찬동했다. 이들은 곧 바로 사매면 대신리,관풍리,오신리 3개부락 구장들을 통해서 역시 4월3일 개명당고개에서 도로보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면민을 동원하여 덕과면 동해골과 동시에 만세의 함성을 터뜨리기로 약속을 했다.
드디어 4월 3일 덕과면민들은 나무를 심기위해서 동해골에 모였고 사매면민들은 도로보수를 하기위하여 계명당고개에 모였다. 오전에는 덕과면과 사매면민 모두가 열심히 나무를 심고 도로보수를 하는것으로 군중들의 모임을 철저히 위장했다. 이석기면장은 나무심기가 끝난 다음 비장한 얼굴도 면민들 앞에 서서 여러분 삼천리 방방곡곡에서는 지금 왜놈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는 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고 우리도 다 함께 만세를 불러 빼앗긴 조국을 찾아야 합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미리 준비된 태극기가 나뉘어지고 5백여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동해골을 우렸다. 때를 같이하여 도로보수를 명목으로 계명당고개에 모여있던 사매면민 3백여 군중들도 동해골의 함성이 터지는 순간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한 마음이된 8백여 양쪽 면민들은 민족의 소망인 독립의 염원을 안고 성난 물결처럼 사매헌병주재소를 향해 나아가 조선은 조선사람의 땅이다. 왜놈들은 물러가라고 10년동안의 굴욕스런 삶에 대한 분노를 일시에 터뜨렸다. 이에 당황한 사매헌병주재소에서는 남원헌병청으로 연락을 하여 오후 6시경 완전무장한 한병들이 기마대와 자동차로 출동하여 내 나라를 찾겠다는 백의민족의 가슴에 총을 쏘아 주동자 이석기님을 비롯한 김선량 이재화 이승순 이풍기 조동선 등을 포박하여 갔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을 기어코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덕과와 사매면들의 불꽃같은 의지는 꺼질줄을 몰랐다. 이날밤 이서익를 중심으로 몇몇이 다시 모임을 갖고 다음날 태극기를 만들고 관풍리 구장 이교준 그리고 김해근 오신리구장 류창근 등은 각 부락을 돌면서 내일의 만세운동에 면민들이 많이 참석할 수 있도록 독려를 하였다. 4월 4일 오후 2시 남원의 북시장에 모인 2천여 군중들은 침략자 일제를 향해 나라를 잃은 백성들의 성난 울부지지음을 터뜨렸으니 동해골과 계명당 고개의 함성은 남원3.1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그날의 횃불이 동해골에 오른지 어언 79개 성상 대쪽같은 푸른 마음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선열들과 고귀한 넋을 기리고 교훈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고자 여기에 탑을 세우고 그 뜻을 새긴다. 1998년 8월
동해골 찬가
동해골주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