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모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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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월현리 산49-9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만성 정병모선생은 전북 김제군 청하면 월현리에서 인상의 장남으로 1882년 10월 18일에 태어나시니 동래인으로 고려조 도지휘사 대호군 인의 19세손이요 조선조 이조판서 풍천공 수홍의 16손이시다. 선생은 때의 개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년이 되시어 일제의 탄압을 손수 맛보시다 끝내는 망국의 한을 안은 채 향리를 떠나시어 전남 장성으로 가셨다. 충효의 가통을 이어 받은 한학자로서 좌시할수없는 일이다 분연히 일어나 결사보국 할것을 결심하시고 이곳에서 후진양성에 이바지 하시였다. 교육을 통하여 우국충절을 고취시키면서 피 끓는 유림과 뜻을 같이 하여 국권을 회복하기위해 노심초사하시고 있을때 1919년 기미독립만세 시위운동이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선생은 때를
놓칠세라 결사의 동지들과 합심하여 밤새워 태극기를 만들어 동년 4월 3일 많은 동지들을 동원하여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시다가 일제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구속된 동지들과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으시면서도 초지일관 조국광복을 끝까지 주방하였으며 자신이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선동한것이라고 진술하였다. 동년 5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1년 6월의 형을 선고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시었으며 출옥후에도 왜경의 눈을 피해 후진들에게 애국사상과 민족정신을 배양하는 한편 스스로 독립운동자금을 내놓으시고 원근에 있는 지사들에게도 권유 모금하는등 많은 활동을 하시다가 혹독한 옥고의 후유증으로 끝내 조국광복을 못보시고 1945년 3월 10일 64세로 향리에서 서거하시니다. 가족으로는 배 양주조씨, 배 언양 김씨와 아들 진묵 손자 창수 광수 영수 증손 상영 상협 상원 상 상천 승인 이다. 정부에서는 독립투쟁의 업적을 높이 찬양하여 1982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 제55273호를 추서하였다. 이에 선생의 조국에 바친 공적을 길이 이 나라 젊은이의 귀감으로 삼고자 정성을 모아 추모의 기념비를 세운다.
사적비가 아닌 추모비였다.
애국지사 만성 정병모선생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