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694-1
- 탐방로그
-
다음은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있는 춘우정 김영상 선생 투수 순절비를 찾아가고 있다.
위치를 정확히 몰랐었는데 다행스럽게 안내판을 만났다.
이 투수비는 저번주에 정읍시 원촌마을 필양사 애국지사 춘우정 김영상 선생 기념비 비문에서 알게 되었다.
전라북도 정읍(井邑)군 고부(古阜)면에서 태어났다. 태인(泰仁)에 거주하며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통분하여 국가의 운명을 개탄하며 두문불출하고 학문을 닦았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고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고 나라가 망한 후 일제가 주는 노인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하고 독립을 역설하다가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군산으로 압송 도중에 만경사창(萬頃沙倉)의 나룻물에 투신했으나 일제 헌병이 한사코 건져내었다. 군산감옥에 투옥되자 9일간 단식을 결행하여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춘우정 김선생 투수 순절 추모비
오호라 여기가 춘우정 김선생이 투수순절하신 신창진 나루의 바로 건너편 유지이구려. 춘평추우 60여년간에 저 나루를 지날때 뜻있는 사람으로서 몇번이나 목이 에었으며 금후 영원한 세월동안 적시창파에 섞인 눈물이 얼마나 흘러갔겠는지 무릇 호생악사는 사람의 상정이지만 무거운 절의를 위해 생명을 가볍게 버리는 일은 지극히 어려울 뿐 아니라 여기에는 숭고한 가치가 있는것이다. 우리 단군성조의 건국하신이래 반만년 동안 국가의 화변이 있을때마다 무수한 의열의 인물이 배출되었음은 모두 민족의 맥박속에 유전한 정기의 발로이며 또는 계?개래한 공로의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선생의 휘는 영상, 자는 승여 호는 춘우정이요 본관은 도강이다. 충민공 회련의 16세손으로 유업세습한 가정에서 단기 4169년 헌종 2년 병신3월 18일에 정읍군 정우면 산북만제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품성이 강개하시고 학문의 조예가 깊었으며 여망이 높으셨다. 일찌기 소문양 인산선생께 수학하셨고 당시 명유 기문절후 사송 문충연제 전간재 제선생과 종유하셨으며 을사늑약후 최면암선생과 함께 의거를 도모하셨으나 뜻을 이루시지 못하셨다. 단기 4243년 순종 4년 경술늑병을 당한후 10월에 왜수의 보낸 소위 은사금을 거절할뿐아니라 보낸 서자를 찢어버리셨다. 그후 불경이란 죄로 동곡 헌병대에 구속되셨으나 조금도 굴치않으시고 단식으로 저항하시다가 그 뒤 군산수옥으로 이송도중 만경강 신창진 나룻배에서 의대찬을 써놓으셨다 그 뜻을 풀이한다면 옛날 굴원의 정충은 루나수에 던져 일기로 삼았는데 이제 나는 양구의 운을 당했으니 사진으로 좇아간다 술 3배로 어복의 충혼을 위로하고 노중연의 답해를 닮아 영원히 물가에 오르내리고저 라는 글을 남기고 즉시 창파에 몸을 던지셨다. 그러나 호송하던 왜졸들에게 구출되어 당일밤 군산수옥에서 단식하신지 8일
오호라 여기가 춘우정 김선생이 투수순절하신 신창진 나루의 바로 건너편 유지이구려. 춘평추우 60여년간에 저 나루를 지날때 뜻있는 사람으로서 몇번이나 목이 에었으며 금후 영원한 세월동안 적시창파에 섞인 눈물이 얼마나 흘러갔겠는지 무릇 호생악사는 사람의 상정이지만 무거운 절의를 위해 생명을 가볍게 버리는 일은 지극히 어려울 뿐 아니라 여기에는 숭고한 가치가 있는것이다. 우리 단군성조의 건국하신이래 반만년 동안 국가의 화변이 있을때마다 무수한 의열의 인물이 배출되었음은 모두 민족의 맥박속에 유전한 정기의 발로이며 또는 계?개래한 공로의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선생의 휘는 영상, 자는 승여 호는 춘우정이요 본관은 도강이다. 충민공 회련의 16세손으로 유업세습한 가정에서 단기 4169년 헌종 2년 병신3월 18일에 정읍군 정우면 산북만제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품성이 강개하시고 학문의 조예가 깊었으며 여망이 높으셨다. 일찌기 소문양 인산선생께 수학하셨고 당시 명유 기문절후 사송 문충연제 전간재 제선생과 종유하셨으며 을사늑약후 최면암선생과 함께 의거를 도모하셨으나 뜻을 이루시지 못하셨다. 단기 4243년 순종 4년 경술늑병을 당한후 10월에 왜수의 보낸 소위 은사금을 거절할뿐아니라 보낸 서자를 찢어버리셨다. 그후 불경이란 죄로 동곡 헌병대에 구속되셨으나 조금도 굴치않으시고 단식으로 저항하시다가 그 뒤 군산수옥으로 이송도중 만경강 신창진 나룻배에서 의대찬을 써놓으셨다 그 뜻을 풀이한다면 옛날 굴원의 정충은 루나수에 던져 일기로 삼았는데 이제 나는 양구의 운을 당했으니 사진으로 좇아간다 술 3배로 어복의 충혼을 위로하고 노중연의 답해를 닮아 영원히 물가에 오르내리고저 라는 글을 남기고 즉시 창파에 몸을 던지셨다. 그러나 호송하던 왜졸들에게 구출되어 당일밤 군산수옥에서 단식하신지 8일
만에 순절하셨으니 향년 76세인 술해 5월 9일이다. 선생몰후에 유림의 공호로 정유년에 이르러 사우를 구거필수상에 세웠으니 명왈 필양사이다. 이제 이땅에 선생의 위적을 기념하는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엇다함은 경하하지 않을수 업다. 최현식동지가 갈문함으로 사양하다못해 삼기 찬기하게 됨을 송구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있는 춘우정 김영상 선생 투수 순절비를 찾아가고 있다.
위치를 정확히 몰랐었는데 다행스럽게 안내판을 만났다.
이 투수비는 저번주에 정읍시 원촌마을 필양사 애국지사 춘우정 김영상 선생 기념비 비문에서 알게 되었다.
위치를 정확히 몰랐었는데 다행스럽게 안내판을 만났다.
이 투수비는 저번주에 정읍시 원촌마을 필양사 애국지사 춘우정 김영상 선생 기념비 비문에서 알게 되었다.
春雨亭 金先生 投水殉節追慕碑
(춘우정 김선생 투수순절추모비)
이곳 신창나루에 우뚝 서있는 순절추모비는 한말의사 춘우정 김선생의 충절을 기리고자 함이다. 선생은 4296년 3.1절에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포상에 추서되었으며 43233년 광복절에 애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격추서되었다.
이 순절추모비는 도내 유지들의 성금으로 4310년에 건립되었으나 1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변환경이 황폐하여 선생의 영령에 죄송스럽게 여기던 즈음 종증손 용기보가 주위의 정화를 주장하고 본손과 협심합력하여 물심양면으로 헌성을 행하였다. 이에 그의 위선심을 찬양하면서 그 전말을 기술한다.
(춘우정 김선생 투수순절추모비)
이곳 신창나루에 우뚝 서있는 순절추모비는 한말의사 춘우정 김선생의 충절을 기리고자 함이다. 선생은 4296년 3.1절에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포상에 추서되었으며 43233년 광복절에 애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격추서되었다.
이 순절추모비는 도내 유지들의 성금으로 4310년에 건립되었으나 1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변환경이 황폐하여 선생의 영령에 죄송스럽게 여기던 즈음 종증손 용기보가 주위의 정화를 주장하고 본손과 협심합력하여 물심양면으로 헌성을 행하였다. 이에 그의 위선심을 찬양하면서 그 전말을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