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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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34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해학유거
의사 해학 이기 선생 사적비

이 기념비는 1995년 10월 1일 이기선생 종친회에서 건립하였다.
이기선생은 1848년 5월 김제에서 태어났다. 1906년 장지연, 박은식 등과 애국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를 조직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07년에 을사오적신인 박제순, 권중현 등을 처단하고자 동지들과 거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일부 동지들과 피체되어 7년 유배형에 처해져 전라도 진도에 귀향갔다가 풀려났다.
그 후 서울에서 호남학회를 세워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09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의사해학이기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종친회에서 성덕면 대석리 대석마을 입구에 1995년 10월 1일 3.3M 규모로 사적비를 건립하였고, 김제시에서는 독립운동가 사적비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하여 2008년 11월 21일 같은 마을에 있는 이기선생 생가 입구로 이설 관리하고 있다.
의사 해학 이기선생 사적비
의사 해학 이기 선생 사적비

해학선생의 휘는 기(沂)요, 자는 백증(伯曾)이고 호가 해학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현종 14년(서기 1848년)에 김제 성덕면 대석리에서 탁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애국지사 해학 이기선생께서 행한 경세(經世) 개혁과 항일투쟁을 겸한 구국운동의 숭고한 이념과 강인한 투지는 우리 민족사상에 등불이 되고 이 고장의 자랑이 되고 있다. 선생은 전통유학의 모화 수구 봉건주의를 지양하고 경세제민 이용후생 광정구국 내용으로 하는 실학의 토대위에 자주적이고 개방적이며 혁신적인 정치 경제 교육의 경정을 제창하였다. 선생은 당시의 폐정을 시정하는 방안으로써 국제(國制)·관제(官制)·전선제(銓選制)·지방제(地方制)·전제(田制)·호역제(戶役制)·잡세제(雜稅制)·학제(學制) 등 8가지 개혁안을 정부에 건의하였다. 특히 전제개
혁과 학제개혁을 보다 중요한 급선무라고 본 선생은 전제개혁을 제출 자신이 직접 토지측량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당시 국정 혼란의 근본적 원인이 독선적인 한학의 유폐에 있다고 지적 한문학의 철폐를 주장하고 국문의 활용을 역설하며 소 중 대학의 학제와 덕육 지육 예육을 내용으로 하는 새교육의 실시를 주장한 선생은 현대문명의 선구적 지도자가 되었다. 선생은 당시 정치의 부패와 도탄에 빠진 민생의 참상을 통감하고 동학군이 봉기할 때에 그들과 제휴하여 당시의 정치를 문란케한 민씨일당과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와 권문세족의 횡포를 제거하고 헌정을 바로 세우는데 직접 행동을 하려는 뜻도 세운바 있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동학군과 끝까지 같이 할 수는 없었다. 당시 외세의 침략으로 국권이 경각에 있음을 통감한 선생은 수시로 구국책을 정부에 제의하고 국민에게 호소하여 위정자의 자성과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그런데도 날로 심해지는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벌여야 할 선생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직접 일본에 건너가 침략자의 수뇌들과 서면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항쟁의 보람없이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한성사범학교의 교관으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1906년 장지연 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필봉으로서의 항일운동과 민중계몽에 전력을 다하였다. 한편 민족
의 탄합과 주체의식의 확립을 위한 종교운동까지 별였다. 이 운동으로서 국조 단군을 신봉하는 종교로서의 단학회 취지와 강령을 기초하였다. 그후에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비관하여 분통을 참지 못한 선생은 식음을 전폐한지 10여일이 된 1909년 7월 13일 63세의 일기로 민족의 한을 품은 채 운명하였다. 광복후 1968년 3월 1일 정부로부터 우리나라 건국 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