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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산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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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산79 애국지사 하몽 정한조선생 사적비가 주위환경이 유흥지로 바뀌는 바람에
상정리 산151-5 선산 애국지사 정한조선생의 묘앞으로 옮겼다고 해서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산79 애국지사 하몽 정한조선생 사적비가 주위환경이 유흥지로 바뀌는 바람에
상정리 산151-5 선산 애국지사 정한조선생의 묘앞으로 옮겼다고 해서 찾았다.
상정리 산151-5 선산 애국지사 정한조선생의 묘앞으로 옮겼다고 해서 찾았다.
애국지사 정한조선생 사적비
정한조선생은 1890년 8월 김제에서 태어났다. 1926년 12월 이리지역 13개 단체 30 여명이 모여서 재만동포 옹호동맹을 결성하여 재만동표에 대한 중국 동담성 군벌정권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하 거족적으로 항거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돌연 일경의 검거령에 의해 수십명의 인사와 함께 피체되었다. 1928년 3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몇 달 앞 둔 1945년 5월에 사망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에에 애국지사 정한조 선생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1994년 10월 10일 3m규모로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정한조선생은 1890년 8월 김제에서 태어났다. 1926년 12월 이리지역 13개 단체 30 여명이 모여서 재만동포 옹호동맹을 결성하여 재만동표에 대한 중국 동담성 군벌정권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하 거족적으로 항거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돌연 일경의 검거령에 의해 수십명의 인사와 함께 피체되었다. 1928년 3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몇 달 앞 둔 1945년 5월에 사망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에에 애국지사 정한조 선생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1994년 10월 10일 3m규모로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애국지사 하몽 정공 한조 사적비
애국지사 정한조선생 사적비
정한조선생은 1890년 8월 김제에서 태어났다. 1926년 12월 이리지역 13개 단체 30 여명이 모여서 재만동포 옹호동맹을 결성하여 재만동표에 대한 중국 동담성 군벌정권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하 거족적으로 항거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돌연 일경의 검거령에 의해 수십명의 인사와 함께 피체되었다. 1928년 3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몇 달 앞 둔 1945년 5월에 사망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에에 애국지사 정한조 선생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1994년 10월 10일 3m규모로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애국지사 정한조선생 사적비
정한조선생은 1890년 8월 김제에서 태어났다. 1926년 12월 이리지역 13개 단체 30 여명이 모여서 재만동포 옹호동맹을 결성하여 재만동표에 대한 중국 동담성 군벌정권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하 거족적으로 항거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돌연 일경의 검거령에 의해 수십명의 인사와 함께 피체되었다. 1928년 3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몇 달 앞 둔 1945년 5월에 사망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에에 애국지사 정한조 선생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1994년 10월 10일 3m규모로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애국지사 하몽 동래정공 한조 사적비
희라 불공재천지수인 애노들의 태형과 고문으로 뼈를 깍는 질곡에도 이 나라 이 겨레만을 위하여 분골새신하신 선생의 휘는 한조요 호는 하몽이 또는 나귀이며 동래정공 대호군 휘 인의 17세손인 휘 기석의 5남매중 장남으로 고종 27년 경인8월 1일 김제 백산면 요교에서 태어낳셨다. 산자수명의 지령은 인걸인지라 자유로 자품준수하며 지기총명으로 유시호학하여 호남 3걸이신 석정 이정직선생 문하에서 근속불번으로 수학하니 박통경사의 석학임에도 스승의 권유와 개화의 신문명을 더욱 읶히고저 경술년에는 경성 신명측량학교에서 2년간 신기술을 배우고 임자년에는 경성 공업전문학원에서 3년여간 신지식을 연수하시며 계속 새로운 물질문명을 읶히다가 무오년에는 이나라 선진교육학교인 공주 영명여학교와 공주 공업실업학교 교사로 부임하자 직간접으로 세궁력진한 국력을 총검으로 강탈한 왜노들의 만행을 주민들에게 주입시키며 배일사사을 고취시키고 대한공복단 박상진 채기중 박재홍 이며 장현식
희라 불공재천지수인 애노들의 태형과 고문으로 뼈를 깍는 질곡에도 이 나라 이 겨레만을 위하여 분골새신하신 선생의 휘는 한조요 호는 하몽이 또는 나귀이며 동래정공 대호군 휘 인의 17세손인 휘 기석의 5남매중 장남으로 고종 27년 경인8월 1일 김제 백산면 요교에서 태어낳셨다. 산자수명의 지령은 인걸인지라 자유로 자품준수하며 지기총명으로 유시호학하여 호남 3걸이신 석정 이정직선생 문하에서 근속불번으로 수학하니 박통경사의 석학임에도 스승의 권유와 개화의 신문명을 더욱 읶히고저 경술년에는 경성 신명측량학교에서 2년간 신기술을 배우고 임자년에는 경성 공업전문학원에서 3년여간 신지식을 연수하시며 계속 새로운 물질문명을 읶히다가 무오년에는 이나라 선진교육학교인 공주 영명여학교와 공주 공업실업학교 교사로 부임하자 직간접으로 세궁력진한 국력을 총검으로 강탈한 왜노들의 만행을 주민들에게 주입시키며 배일사사을 고취시키고 대한공복단 박상진 채기중 박재홍 이며 장현식
백관수 등과 유대하며 반일운동을 선동하고 기미독립만세사건에 깊이 관련되어 공주형무소에서 3년간 영어되셨고 은거참례하면서도 김제 청운의숙과 백학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경술국치이후로 왜노목적상을 항의규탄할뿐아니라 조선일보 이리지사국장을 겸임하면서는 언론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을축4월 11일에는 이리청년회와 노동조합을 조직 결성하고 조합장으로써 정재양민을 표방하고 기권익보호에 앞장서며 사무실 옥상에는 단결이라는 대형기치을 세우고 민심을 환기시키며 신간회와 애국부인회등으로 민족각성과 결속을 위하려는 10여개 단체를 조직하고 강화라는 이외에도 병인8월에는 지우당이라는 극비의 당을 조직하고 배헌 임영택 임혁근 조명희 이동지 김병수들과 반일투쟁하며 재만동포옹호위원사건에 이러 이리폭발물 사건으로 기사11월 군산경찰서에 구속되었고 무진3월에는 전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징역사리 한 후로는 더욱 반일운동을 강행하며 노해교사건과 만보산사건의 연유로 또 다시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감옥사리하신호누는 광주에 있는 호남지구 사상관찰소의 제1호 요시찰 인물로 자택연금당하니 혹독한 탄압과 감시로 불고출입수년이라는 기간의 태독과 질병으로 신음중에도 목전왜망에 아자주독립이라 보수설한 아쉽고나 하시면 광복직전인 을유5월 19일 원졸하시니 오호라 애재라 통재로다. 평생을 감시와 구속과 태형과 고문의 철장속박의 철전지한인 삶의 참황사가 실기되여있었으나 경인6월 25일 국내사변의 병화로 모두 화소되어 실사확인부재아며 이제까지 미수훈였으나 김제 익산 이리지역 연노며는 누구나 주지지사라. 특히 정인화 이태술 양노옹께서는 직접참여로 밀의행보한 실증외에도 기지사실인지라. 계유지년에 진충보국의 건국포장이 수여되였으니 유충유효는 유방백세지사로다. 이 나라 금수강산과 민족의 안녕만을 위하여 싸우신 선생의 고귀한 애국애족의 의적가행을 당시인 부재고로 전모사실구현 못
하고 발췌한 지득실황만을 기록함이 선생의 충의지행에 누가될가 송구지심이라 후의 병필인을 원망하며 감히 찬함이니 기리 경지경지 천추경앙하리로다.
사적비에 소개된 하몽선생의 스승이신 이석정선생의 생가가 부근에 있었다.
하지만 애국지사의 사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안내를 찾을수없었다.
하지만 애국지사의 사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안내를 찾을수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