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0-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둘러 고장출신 두애국지사의 추모비를 건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면내 기관장과 사회단체 유지들이 앞장서 참여하고 관내 공무원과 이장 새마을지도자들은 물론 어린 국민학교 학생들로부터 중고등학교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줄을 이어 참여하니 장군은 가셨어도 일편단심 나라위한 충혼은 이 땅에 다시 살아 숨쉬고 있다.
단기 4320(서기 1987)년 11월 23일
단기 4320(서기 1987)년 11월 23일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0-2 위령각 학수재이다.
가신 님 영전에
청정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가신 님 그리워서 두 손을 모읍니다
생전에 거니시던 학수재 뜨락
노송은 오늘도 푸르기만 한데
가신 길이 그렇데고 멀으옵니까
봄이면 진달래 아카시아 향기
여름엔 서풍에 쓰르라미 노래
못 잊어 그리워서 어디 가 계십니까
합죽선에 노랫가락 낭랑한 시조소리
오늘도 아련히 귓전에 맴도는데
그 모습 그 얼굴 어디 가서 뵈오리까
청정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가신 님 그리워서 두 손을 모읍니다
갑신 추석 현학
청정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가신 님 그리워서 두 손을 모읍니다
생전에 거니시던 학수재 뜨락
노송은 오늘도 푸르기만 한데
가신 길이 그렇데고 멀으옵니까
봄이면 진달래 아카시아 향기
여름엔 서풍에 쓰르라미 노래
못 잊어 그리워서 어디 가 계십니까
합죽선에 노랫가락 낭랑한 시조소리
오늘도 아련히 귓전에 맴도는데
그 모습 그 얼굴 어디 가서 뵈오리까
청정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가신 님 그리워서 두 손을 모읍니다
갑신 추석 현학
애국지사 넋 기리는 학수재 위력각으로 구한말 원평지역 동학혁명 참여자, 일제시대 광복을 위해 항일운동을 펼쳤던 남정 이종희 장군 및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있는곳이다.
또한 이 지역은 1984.11.25동학농민혁명 최후 전투지역으로 수많은 전몰용사들이 산화한 장소이며 위분들의 위패를 모셔 해마다 원평학수재 연락회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은 1984.11.25동학농민혁명 최후 전투지역으로 수많은 전몰용사들이 산화한 장소이며 위분들의 위패를 모셔 해마다 원평학수재 연락회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애국지사 남정 이종희장군 추모비
애국지사 남정 이종희 장군 추모비 및 위령각
이종희 선생은 김제출신으로 만주를 거쳐 광동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중국의 황포군관학교 제1기를 졸업하고 상해 남경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중국군 부대 상위연장으로 복무하면서 남경에서 의열단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1936년 2월 민족 혁명당에 입당하여 군사국 특무부의 책임자로서 일제 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였다.
1938년 10월 김약산, 박효삼, 이익성, 김세일 등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고,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에 따라 광복군 제1지대의 소교로 임명되어 총무조장으로주로 대원들의 군량 수금 사무, 신입 대원에 대한 교육 훈련과 인원 파견, 그리고 교육훈련이 끝난 대원들을 적 점령지구 파견하여 초모 선전, 정보수집 및 연합군과의 합작공작 등 임무를 수행하게 하면서 각 구대의 공작활동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는 초대 지대장인 김약산의 뒤를 이어 제2대 제1지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광복시까지 임시정부의 정원의원과 광복군 고급 참모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귀국 도중 선중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김제 유림들의 뜻을 모아 위령각에 이종희장군과 원평장터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항일 독립운동가 아홉 분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10월 15일 위령제를 지내고 있으며, 1987년 11월 23일 이종희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29M 규모로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이종희 선생은 김제출신으로 만주를 거쳐 광동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중국의 황포군관학교 제1기를 졸업하고 상해 남경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중국군 부대 상위연장으로 복무하면서 남경에서 의열단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1936년 2월 민족 혁명당에 입당하여 군사국 특무부의 책임자로서 일제 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였다.
1938년 10월 김약산, 박효삼, 이익성, 김세일 등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고,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에 따라 광복군 제1지대의 소교로 임명되어 총무조장으로주로 대원들의 군량 수금 사무, 신입 대원에 대한 교육 훈련과 인원 파견, 그리고 교육훈련이 끝난 대원들을 적 점령지구 파견하여 초모 선전, 정보수집 및 연합군과의 합작공작 등 임무를 수행하게 하면서 각 구대의 공작활동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는 초대 지대장인 김약산의 뒤를 이어 제2대 제1지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광복시까지 임시정부의 정원의원과 광복군 고급 참모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귀국 도중 선중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김제 유림들의 뜻을 모아 위령각에 이종희장군과 원평장터기미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항일 독립운동가 아홉 분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10월 15일 위령제를 지내고 있으며, 1987년 11월 23일 이종희 장군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29M 규모로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장군의 휘는 종희이고 호는 남정이다. 독립투사로서 망명지 중국에서 가명으로 위장한 이름을 다 알수는 없으나 기록에 나타난것을 보면 집중, 집중, 인홍, 종암등으로 사용하였으니 때와 곳에 따라 새로운 사명이 전개될때마다 바꿔진 이름을 볼때에 처절했던 항일투쟁사의 한 단면을 엿볼수가 있다. 장군의 관향은 전주이고 도평군의 18세손이며 바어지 태식공과 어머니 김해김씨의 장남으로 1890년 4월 19일 본면 구미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망국지백성으로서 너의 재조와 사람된 그릇이 아깝다"고한 이 말은 장군의 은사 학담 최세현선생의 탄식이었다고 한다. 훤칠한 키에 재조가 뛰어났고 빛나는 안광은 만인을 제압할수 있는 장군감이었다고 지금도 마을 논로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의협심이 강했던 장군께선 미기3.1운동당시 일제의 잔인한 살인폭정을 목도하고 나라잃은 백성으로서 비장한 각오와 결심이 섰던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2남 1녀의 어린자식들을 향리에 남겨둔채 만주땅을 찾아 이국만리 북풍설한속에서 파란만장한 장군의 한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1919년 조선의열단에 입단하였고 1922년 중국 상해에서 일군 전중의일 육군대장을 저격했으나 미수에 그쳐 실패하고 동지 2명은체포된채 장군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였다. 1925년 중국 광동에 있는 홍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상해와 남경등지에서 치열한 항일투쟁을 계속하며 1938년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조선의용대 총무조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43년 광복군 제1지대장과 고급참모를 역임하였으며 1942년과 1944년 양차에 걸쳐 임시정부의정원 의원으로서 전라도대표로 활동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1946년 3월 28일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도중 선상에서 별세하니 1977년 12월 13일 국가에선 고인의 독립투쟁공적을 높이 찬양하여 건국훈장 국민장(547호)을 추서하였다. 몽상간에도 그리던 조국의 산하를 목전에 두고 귀국선상에서 불귀의 객이 된 장군의 죽음은 국가적인 손실이오 우리고장의 큰별을 잃은것이다. 장군의 유해는 장군이 어릴적 뛰놀던 구미마을 동산에 한줌의 흙으로 묻혀있다가 금년 5월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하였고 장군의 생가는 구미마을에 그대로 남아있다. 장군이 가신지 40여년 만시지탄이나 학수재 노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