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명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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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0-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가신 님 영전에

청정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가신 님 그리워서 두 손을 모읍니다

생전에 거니시던 학수재 뜨락
노송은 오늘도 푸르기만 한데
가신 길이 그렇데고 멀으옵니까

봄이면 진달래 아카시아 향기
여름엔 서풍에 쓰르라미 노래
못 잊어 그리워서 어디 가 계십니까

합죽선에 노랫가락 낭랑한 시조소리
오늘도 아련히 귓전에 맴도는데
그 모습 그 얼굴 어디 가서 뵈오리까

청정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가신 님 그리워서 두 손을 모읍니다

갑신 추석 현학
애국지사 넋 기리는 학수재 위력각으로 구한말 원평지역 동학혁명 참여자, 일제시대 광복을 위해 항일운동을 펼쳤던 남정 이종희 장군 및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있는곳이다.
또한 이 지역은 1984.11.25동학농민혁명 최후 전투지역으로 수많은 전몰용사들이 산화한 장소이며 위분들의 위패를 모셔 해마다 원평학수재 연락회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애국지사 용계 김덕명장군 추모비

동학혁명의 주역 김덕명(金德明)

동학의 주역 김덕명은 1845년(헌종 11년) 10월 27일에 금구 용계(龍溪, 현 금산면 쌍용리 용계)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42세때 1886년(고종 23년)에 전라도지방에 동학이 포교되고 있었다.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세상을 개혁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자는 교리를 접한 그는 최시형(崔時亨)에게서 도를 받고 이듬해(1887년)에는 원평에서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고 포교에 주력하였다.
그는 1892년(고종 29년) 11월 삼례에서 신원운동이 있을시 교도를 만여명이나 동원하여 관에 압력을 가한적이 있으며, 1894년(고종 31년)에 전봉준이 주동한 고부민란 이후 그해 3월 김덕명은 총참모가 되어 백산에 모여 혁명을 주동했으며, 이때 김덕명포에서 동원된 혁명군은 2천여명이라고 한다. 동학군이 4월 7일 황토현전투에서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기까지 김덕명포의 동학군이 주력을 이뤘다고 한다.
마침내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원평으로 좌초하고 10월 25일 귀미란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듬해 1895년 체포되어 51세를 일기로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구미 용담에서 최제우교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의 "인내천"사상은 조선왕조의 학정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고에 시달리던 전라도 농민들에겐 희망에 찬 새로운 복음이었다.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도높은 깃발은 당시 억압과 수탈의 상징이었던 고부군어를 처부수고 백산기포(갑오 3월 21일)에 구름같이 모인 동학농민 혁명군의 대도창명이었다. 이 고장 출신 김덕명장군이 백산기포의 총참모로서 선봉장이 되었고 그분의 군호에 따라 우리들의 조상인 지역농민들이 손에 손에 죽창을 들고 동학농민군의 혁명대열에 앞장서 황토현에서 공주 우금치에서 마지막 원평항전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져 싸웠으니 이 고장에 사는 오늘의 우리는 자랑스런 혁명군의 후예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게 된다. 김덕명장군은 동학의 전도로 중진인물(금구 대접주)로서 동학교조 신원운동의 참례집회와 금구 원평 집회를 주도한 민족종교운동의 선구자였다. 장군의 휘는 준상이오 자는 덕명이고 호는 용계다. 관향은 언양으로서 신라경순왕의 일곱번째 아들인 언양공의 29세손이다. 아버지 한기공과 어머니 파평윤씨의 장남으로서 본면 쌍용리 용계마을에서 1845년 을사10월 29일에 출생하였다. 향노들의 전언에 의하면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6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였고 장골풍채에 담론이 유창하여 시리를 분멸하는데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군이 홍토현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전주에 입성하여 농민의 함성이 호남평야에 포효하기까지 금구 김덕명포의 몰해 이 어느 과도었는가는 다음 몇가지 문헌을 통해 고증할수있다. "문헌명...", 상의 문헌으로 보아 전라도 동학의 중심지는 대도회소가 있었던 이 고장 금구원평이었음을 알수가 있고 금구 김덕명포의 총사였던 장군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혁명가적 정치력량을 집작할수가 있다. 아세아의 정치판도를 바꿔 놓을 계기가 되었던 갑오 동학농민혁명
의 실질적인 실력자 김덕명장군은 원평싸움(갑오 11월 25일)과 태인싸움을 마지막 항전으로 1895년 을미 정월 1일 본면 장흥리 안정 절골에서 태인수성군에 의해 피체되어 그해 3월 29일 서울에서 같은 혁명동지 전봉준 손화중 최영선 성두환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혁명가의 한생이 막을 내렸으니 향년 51세였다. 장군이 가신지 92년만에 이 고장 노인들의 모임인 원평 학수재 영락회 회원들이 주체가 되어 장군의 애국혁명정신을 추모하고 원평항전에서 산화한 수많은 영령들이 묻혀있는 이곳 학수재 동산에 고인이 된 영락회 회원들과 함께 위패를 모시기 위한 위령각을 짓고 고장 출신 애국지사의 추모비를 건립하다는 것은 노인들의 우국애정과 높은 애향심에 더욱 머리숙여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0-2 위령각 학수재이다.
동학혁명의 주역 김덕명(金德明)

동학의 주역 김덕명은 1845년(헌종 11년) 10월 27일에 금구 용계(龍溪, 현 금산면 쌍용리 용계)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42세때 1886년(고종 23년)에 전라도지방에 동학이 포교되고 있었다.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세상을 개혁하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자는 교리를 접한 그는 최시형(崔時亨)에게서 도를 받고 이듬해(1887년)에는 원평에서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고 포교에 주력하였다.
그는 1892년(고종 29년) 11월 삼례에서 신원운동이 있을시 교도를 만여명이나 동원하여 관에 압력을 가한적이 있으며, 1894년(고종 31년)에 전봉준이 주동한 고부민란 이후 그해 3월 김덕명은 총참모가 되어 백산에 모여 혁명을 주동했으며, 이때 김덕명포에서 동원된 혁명군은 2천여명이라고 한다. 동학군이 4월 7일 황토현전투에서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기까지 김덕명포의 동학군이 주력을 이뤘다고 한다.
마침내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원평으로 좌초하고 10월 25일 귀미란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듬해 1895년 체포되어 51세를 일기로 형장에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