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암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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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12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128-1 금산사 상가 입구 애국지사 정화암 선생 사적비를 찾아왔다.
육탄삼용사 故 안영권 하사 전공비 바로 옆이었다.
애국지사 정화암 선생 사적비
선생은 구한말의 풍운 속에서 태어나 망국의 슬픔을 몸소 겪으면서 청운의 뜻을 굳혔고, 3.1운동의 봉화 속에서 독립만세의 파도속에 묻혔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천신만고를 감수하시면서 상해로 북경으로 북만주로 전전하고 대륙의 동서와 남북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때로는 노동운동 선무공작을 벌이고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남화한인연맹을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구국연맹행동대(흑색공포단) 서간단, 유격대 등을 편성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습니다. 8.15 해방후에도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중국에 머물면서 교포들의 교화와 교육에 주력하시고, 중국의 저명인사들과 같이 한국학연구의 길을 트는 등 오직 조국만을 위하여 헌신하셨으며, 늦게 귀국해서도 잘못된 정치현실을 꾸짖고 반독재 민주회복투쟁에 앞장서는 등 한평생을 의협과 의분으로 싸우셨고 고결하게 지조를 지켜오셨던 진정한 애국자이며, 무정부주의자로서 참된 민주건설에 헌신하셨던 투사였습니다. 반독재투쟁을 하여 일시 옥고도 겪었습니다. 선생의 한 평생은 헤아릴 수 조차 없는 위기와 굶주림 속에서도 인내와 투지로서 역경을 이겨내고 조국광복에 이바지한 투쟁의 연속이었으며, 그 많은 쾌거들은 산하를 진동시키고 누구나 울음을 금치 못하게 하는 장엄한 기록들이었습니다. 선생의 투쟁 경력은 중국사료에도 전형적인 혁명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생께서 만일에 자기선전을 하고 권모와 술수로서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고 현실정치에 부화를 했더라면 아마 선생은 상당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며 말년에 그처럼 쓸쓸한 생애를 마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선생은 일신의 영화를 탐내지 않았으며 자기의 이념과 소신에 철저하셨습니다. 참으로 선생은 우리 독립운동사, 민주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진정한 독립투사요, 민주주의자요, 애국자였습니다. 한 평생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만을 위하여 헌신하여 오셨던 선생에게 우리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선생은 생전에 국가에서 주는 훈장이나 연금을 거부하였고 혁명적 지조를 지키다 가셨습니다. 국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 8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이곳 금산사 앞뜰에 건립한 정화암 선생 사적비는 뜻있는 인사와 김제시의 협조하에 1992년 12월 15일에 건립하였습니다.
애국지사 정화암 선생 사적비

선생은 구한말의 풍운 속에서 태어나 망국의 슬픔을 몸소 겪으면서 청운의 뜻을 굳혔고, 3.1운동의 봉화 속에서 독립만세의 파도속에 묻혔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천신만고를 감수하시면서 상해로 북경으로 북만주로 전전하고 대륙의 동서와 남북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때로는 노동운동 선무공작을 벌이고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남화한인연맹을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구국연맹행동대(흑색공포단) 서간단, 유격대 등을 편성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습니다. 8.15 해방후에도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중국에 머물면서 교포들의 교화와 교육에 주력하시고, 중국의 저명인사들과 같이 한국학연구의 길을 트는 등 오직 조국만을 위하여 헌신하셨으며, 늦게 귀국해서도 잘못된 정치현실을 꾸짖고 반독재 민주회복투쟁에 앞장서는 등 한평생을 의협과 의분으로 싸우셨고 고결하게 지조를 지켜오셨던 진정한 애국자이며, 무정부주의자로서 참된 민주건설에 헌신하셨던 투사였습니다. 반독재투쟁을 하여 일시 옥고도 겪었습니다. 선생의 한 평생은 헤아릴 수 조차 없는 위기와 굶주림 속에서도 인내와 투지로서 역경을 이겨내고 조국광복에 이바지한 투쟁의 연속이었으며, 그 많은 쾌거들은 산하를 진동시키고 누구나 울음을 금치 못하게 하는 장엄한 기록들이었습니다. 선생의 투쟁 경력은 중국사료에도 전형적인 혁명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생께서 만일에 자기선전을 하고 권모와 술수로서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고 현실정치에 부화를 했더라면 아마 선생은 상당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며 말년에 그처럼 쓸쓸한 생애를 마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선생은 일신의 영화를 탐내지 않았으며 자기의 이념과 소신에 철저하셨습니다. 참으로 선생은 우리 독립운동사, 민주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진정한 독립투사요, 민주주의자요, 애국자였습니다. 한 평생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만을 위하여 헌신하여 오셨던 선생에게 우리는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선생은 생전에 국가에서 주는 훈장이나 연금을 거부하였고 혁명적 지조를 지키다 가셨습니다. 국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 8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이곳 금산사 앞뜰에 건립한 정화암 선생 사적비는 뜻있는 인사와 김제시의 협조하에 1992년 12월 15일에 건립하였습니다.
지사 동래정공 화암 선생 사적기
선생은 1896년 병신 9월 14일 충절의 고장 김제에서 부친 항전공과 모친 진주강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때는 마침 이웃고을 고부에서는 동학농민군의거가 실패로 돌아간지 겨우 두 해가 지난때였고 또 같은해에 이웃고을 정읍에서는 선생의 혁명동지로서 휴척을 같이하다가 일제 무리의 옥중에서 순국하신 백정기 의사가 고고성을 발하던 해이기도 하였다. 선생이 타고난 숙명은 혁명가로서 지워진듯이 외조부 강진사께서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다가 관군에게 교수형을 받은 사실이 있어서 모친께서는 선생을 잉태한 몸으로 강진사의 시신을 모시기 위해 처형장을 지켜보아야 했다는 사실에 미루에 선생은 이미 격랑의 세월속에서 저항과 투쟁의 자세로 살아나가야할 남다른 숙연을 지니고 있었다하겠다. 선생은 소년 시절 벌써 학덕과 식견이 비범하여 망국의 한을 품고 일구월심 설치구국의 포부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차에 거족적인 3.1 대의거가 일어나 우선 아우되시는 중옥씨가 만세시위에 앞장섯고 선생은 분연히 조국광복운동의 일익을 담당할 결심을 새롭게 하사 양기탁 지사 등과 강림부를 조직하고 활약하던 중
비밀이 누설되고 김상옥 열사의 의거 등 적의 주목이 요시찰 인물로 낙인된 선생에게로 집중되므로 더 이상 국내에 있어서는 대적항일이 불가능하므로 망명의 길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여 우선 북경에 정착하여 김창숙 신채호 이회영 선생들과 제휴하고 춘풍추우 기나긴 세월을 같이 하면서 국권회복과 자유혁명을 위해서는 아니해 보신 일이 없으실 정도로 투쟁하시는 과정에서 노장학파와 궤도이론이 비슷한 아나키스적 논리가 요청된다고 판단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와 대결해야할 입장에 있는 중국 국민혁명의 원로 오추휘 이석증과 동족의 원로인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신채호 유자명 백정기 이을규 동지등과 협의하고 재중국 아니키스로 연맹을 조직하고 한수현에 양도촌 건설하여 최초 자치운동전개 남화한인청년연맹 흑색공포단 조직 1925년 6월 상해공단연합을 중심으로 대일 영총파업단행, 1927년 복건성 민단편련처 조직, 1928년 5월 일제배척운동 1929년 노동대학에 참가 1930년 10월 김좌진 장군 서거후 북만운동 수합지동주구배며 폭한들의 행패로 만주를 철수 1932년 11월 17일 이회영 선생의 순국을 계기로 친일주구배 숙청에 전력을 기우려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제휴하고 적극 격렬하게 공격태세를 취하여 수많은 밀정 숙청과 일제의 음모공작을 파괴하던 중 엄형순 등 열형동지들이 순국하고 육삼정의거를 일으켜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동지들은 장기간 적의 옥중에서 신음하였다. 그뒤 77사건 발발로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통해서 유시평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협의하여 측면으로 상호 협조하였으며 또 광복군을 지원하다가 상상외로 일제가 돌연히 무조건 강복하여 8.15광복절을 마지하게 되었다. 8.15후에도 혁명사업의 뒷처리와 미진한 일을 청산키 위하여 수년간 중원대륙을 남북으로 종횡하면서 상해거류민단장과 인성학교이사장으로 교포의 구호와 교육에 주력하며 중국원로 오추위 등과 조선학전관 신채호학사를 설립하여 한국학연구의 길을 트고 사상계몽을 하시다 1954년 6월 영주귀국하였으나 인위적으로 갈려진 조국통일에 정열을 쏫고 영일이 없이 뇌심초사하면서 활동하던중 5.16군사 구데타로 옥고를 치루는 등 쓰라린 경험을 격으시며 반독재민주투쟁을 벌리는 등 여생의 일각까지 청렴고고한 지조를 지키는 형극의 길을 것다가 1981년 1월 21일 그렇게도 염원하시던 조국통일의 실마리도 찾지 못하신 채 8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다하셨다. 선생의 휘는 현섭 자는 윤옥 호은 화암이다. 1983년 8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로 받으시다. 오호라 선생의 생애는 의협선행과 솔선궁행으로 이사모의를 물리첫고 의분과 혈루로 얼룩진 장엄한 쾌거는 산하를 진동시키고 귀신도 감루를 흘리게 하였으니 그 공적을 백척풍비로도 다 표현할 수 없으며 더욱히 중국의 석학들과 한국학을 창설하고 우리
정치문화계에서 끝가지 고결한 자세로 일관하였으니 어무수문의 일단과 세한송백의 기상을 길이 풍기고 있다. 배는 수원백 영단이며 슬하에는 자에 철제, 녀에 정원 원중화 손에 영덕 명덕 인과 안이 있고 자부에는 신금선이 있다.
서기 1991년 신미 추
대한민국광복회 회장 이강훈 글을 짓고 이상록 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