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수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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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65-1
탐방로그
장태수 선생은 송재 장현식 선생의 증조부가 되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일유재 장태수선생사적비

구한말을 전후하여 일제 침략에 항거하다가 순국함으로서 청사에 빛을 남긴 의인열사들이 많으나 그 중에서도 나라를 위하여 대절을 지키되 부모가 주신 유체에 상흔을 내지 않고 단식으로 죽음을 기다려 끝까지 충과 효를 양전한 분이 있으니 이는 곧 일우재 장태수선생이다. 선생은 자가 성안이요 호는 일우재라하니 본관은 인동으로 고려조의 의신인 덕녕부윤 송은공 안세를 현조로하여 산연공 한두의 3남으로 헌묘 신축년 12월 24일에 김제군 금구면 상신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고 지기가 탁이하여 철묘신유년에 21세의 약관으로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관은 승문원 정자전적 예조정랑 지평헌납 병조참의 대동련 부승지 중추원 의관등 요직을 거쳐 종2품인 가선대부 지종원 부유에 이르고 외직으로는 양산과 고산의 두 군수를 역임하였다. 양산은 해구를 막는 동남방의 요충인데도 방어시설이 소흘한지라 부임즉시로 조정에 상신하여 금오천냥을을 보조받고 사재 오천냥을 자연하여 합 일만냥으로 병기와 선박등 전략물을 갖추고 별포군 100며명을 양성하여 불우에 대비하니 이는 한말의 일제침략을 예견한 유비
무환책이었다. 이때 그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이를 송공하려하였으나 선생의 강력한 거절로 뜻이르기를 포기터니 거관후에야 입비하고 더욱 그 덕을 칭송하였다. ?고산현 부임시는 이미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날때라 조야가 모두 전긍하였으나 선생은 교화와 회유의 은정으로써 민심을 선도하고 생업을 안정케하였으니 이는 조저에서 다스리기 어려운 지방에 특히 선생을 선정하여 맡기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게되자 그 허물이 어찌 매국7적에게만 있느냐며 자문하고 스스로 하늘을 불수없는 대죄인이며 부모를 대할수 없는 대불효를 지었다는 자죄문을 짓고 자신이 불충불효라는 자책감으로 스스로 죄인이라하여 단식에 들어갔으며 또한 왜정이 한국인 중신들을 회유키 위하여 주는 돈을 뿌리지면서 추한 돈을 가지고 감히 불한인을 치욕하느냐며 이를 꾸짓는 토왜문으로 적도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임종에 임박하여는 고대한동포문을 지어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으면 반드시 살아날길이 있을것이요 반대로 마음과 힘이 분산되면 죽는 길이 있을뿐이라 하여 민족의 일치단결을 읍소하면서 부모에게서 온전하게 받은 이 몸이 왜적의 칼을 받으며 또한 스스로도 살상할수있으랴하면서 조용히 누워 절식한지 27일만인 경술년 11월 27일에 서거하니 향년70이다. 선생의 이 입절의사는 ?인에게 ?효지심을 격앙시킨 백세청풍이요 침략자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었다. 선생의 유지도칙은 이후 온 민족의 독립의지로 승계되어 마침내 왜적을 물리치고 조국광복을 이룩하였으며 이 고을 유림들의 정성으로 여기에 서강사를 세워 송은공과 더불어 춘추로 제향을 받들고 1962년 3월에는 정부로 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으니 선생의 위업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나리라 이제 군민의 뜻을 모아 비를 세우고 사적을 약술하니 선생의 그 고청하신 정신이 어찌 졸문으로 현양되리오마는 다만 유적지에 표성하여 후인의 관감지자로 삼고자 할뿐이다.
전북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65-1 일유재 장태수선생 순국지 남강정사를 찾아왔다.
남강정사(南崗精舍)

서기 1841년(헌종 7년, 신축년) 12월 24일, 구한말(舊韓末) 충신 장태수(張泰秀:1841~1910, 호:일유제) 선생이 탄생하신 곳입니다. 1861년 약관 21세(철종 12년, 1861)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시종원 부경(副卿)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이미 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일본의 속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에 비분을 금치 못하시고 낙향하여 이곳에 머물고 계실 때 일본 헌병이 찾아와 일본 천황이 하사하는 은사금을 받으라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하며 통지서를 내놓았으나 일유제 공은 "비록 나라는 망하였으나 대한의 고위직 신하로 어찌 더러운 돈을 받느냐"며, 일본 헌병을 꾸짖으며 호통하였습니다. 일본 관헌이 돌아간 후, 공이 웃으시며 말씀하시길 "이 때가 바로 죽을때다." 하시며 단식을 단행, 27일만에 오호통제라 순절하신 장소입니다.
남강정사(南崗精舍)

이 가옥은 대한제국말의 충신 장태수가 살았던 곳으로, 그의 부친이 1800년경에 지은 것이라 여겨진다. 장태수는 헌종 7년(1841) 이곳에서 태어나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아갔다. 고종 때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하고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부친이 죽자 다시 관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장태수는 통탄하면서 단식에 들어가 동포에게 주권회복을 호소하는 글을 남긴 채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초가지붕인 이 건물은 가운데 큰방을 두었고 그 좌우에 방과 대청을 꾸몄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을 주는데, 사라져 가는 전북지방 민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유재 장태수선생사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