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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50-1
- 탐방로그
- 전북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50-1 애국지사 장태수 선생의 사당인 서강사를 찾아가는 중에 장태수 선생 생가 표지판을 만났다. 생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먼저 생가 표지판을 따라갔다. 생가터에 서강사 재실을 지은 것이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西岡祠(서강사)
이 사당은 대한제국말 충신 장태수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으로, 1935년 인동장씨 집안에서 세웠다. 장태수는 현종 7년(1841)에 이곳에서 태어나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갔다. 고종 때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하고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부친 사후 다시 관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일본의 만행이 심해지자 새로운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이곳에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세웠다. 1910년 나라가 망하고 학교가 폐교되자 장태수는 통곡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이 건물은 조선후기 목조 건축의 기법을 잘 계승한 건물로, 구조도 매우 짜임새가 있다.
이 사당은 대한제국말 충신 장태수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으로, 1935년 인동장씨 집안에서 세웠다. 장태수는 현종 7년(1841)에 이곳에서 태어나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갔다. 고종 때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하고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부친 사후 다시 관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일본의 만행이 심해지자 새로운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이곳에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세웠다. 1910년 나라가 망하고 학교가 폐교되자 장태수는 통곡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이 건물은 조선후기 목조 건축의 기법을 잘 계승한 건물로, 구조도 매우 짜임새가 있다.
전북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50-1 애국지사 장태수 선생의 사당인 서강사를 찾아가는 중에 장태수 선생 생가 표지판을 만났다.
생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먼저 생가 표지판을 따라갔다.
생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먼저 생가 표지판을 따라갔다.
생가터에 서강사 재실을 지은 것이었다.
서강사(西岡祠)
구한말 충신 장태수(張泰秀:1841~1910 호 : 일유제) 선생은 나라를 빼앗긴 고위직 신하가 일본 천황의 은사금을 받을 수 없다며, 일본 헌병의 온갖 협박과 회유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충절을 굳게 지키신 분입니다. 망국의 슬픔을 탄식하시면서 27일동안 단식을 단행하시다가 순국하신 애국선열입니다. 오직 대한 독립을 염원하신 애국열사 일유제 선생의 숭고한 사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지역 유림이 중심이 되어 사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정부에서도 10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구한말 충신 장태수(張泰秀:1841~1910 호 : 일유제) 선생은 나라를 빼앗긴 고위직 신하가 일본 천황의 은사금을 받을 수 없다며, 일본 헌병의 온갖 협박과 회유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충절을 굳게 지키신 분입니다. 망국의 슬픔을 탄식하시면서 27일동안 단식을 단행하시다가 순국하신 애국선열입니다. 오직 대한 독립을 염원하신 애국열사 일유제 선생의 숭고한 사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지역 유림이 중심이 되어 사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정부에서도 10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百世淸風(백세청풍)
西岡祠 廟庭碑(서강사 묘정비)
百世淸風(백세청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