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식 기적비

4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50-1
탐방로그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50-1 애국지사 장태수(張泰秀) 선생 생가터 사당 서강사 옆에 송재 장현식 선생 기적비가 건립되었다고 해서 다시 찾았다. 서강사의 일유재 장태수 선생은 송재 장현식선생의 증조부가 되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송재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범위는 실로 광범위했다. 국어학자가 아니면서도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조선어학회 회원이 되어 학회 지원에 앞장섰다.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한글의 명맥을 잇기 위해 1921년 조직된 조선어학회는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이병기 등 당대 최고의 국어국문학자들 뿐 아니라 안재홍 김도연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결집한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1939년부터 한국어 말살정책을 강화한 일제는 1942년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을 준비하던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을 검거, 투옥했다. 편찬 자금 3천원을 내놓은 선생도 수감돼 재판을 받았다. 더욱이 선생은 혓바닥에 대침을 맞는 극악무도한 고문을 당해 후유증으로 발음을 제대로 못하는 큰 고통을 겪었다.
이렇듯 선생은 독립을 위한 것이라면 일신상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거액을 기어이 희사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독립운동사 자료에 따르면 선생은 모두 4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집안의 막대한 재산이 독립운동에 쓰여 해방 후 토지개혁 때는 땅이 없었다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선생은 회고록에 쓰고 있다. 정부는 송재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일유재 선생의 건국훈장과 함께 우리 고장에 영원히 새겨질 충의정신의 상징이라 하겠다.
해방정국에서 선생은 인촌, 고하,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선생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 이승만 박사를 지지했고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공헌했다. 선생은 제2대 전북지사를 지낸 후 6.25 동란 중 납북되어 북한 땅에서 별세했다.
울산 김씨와 결혼한 선생은 4남 4녀를 두었다. 장남 홍 선생은 종가의 고택을 전주시에 기증했다. 이 고택은 전주향교 인근에 원형대로 옮겨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주전통문화연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표지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송재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이 기적비는 전북문화원연합회에서 주관하여 세운 것임을 밝힌다.
2019년 5월 기미독립만세운동 100주년에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나종우 글을 짓다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50-1 애국지사 장태수(張泰秀) 선생 생가터 사당 서강사 옆에 송재 장현식 선생 기적비를 찾으러 왔다.
서강사(西岡祠)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50-1 / 관리번호 : 51-1-16 / 관리자 : 인동장씨 서강사 문중
구한말 충신 장태수(張泰秀:1841~1910 호 : 일유제) 선생은 나라를 빼앗긴 고위직 신하가 일본 천황의 은사금을 받을 수 없다며, 일본 헌병의 온갖 협박과 회유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충절을 굳게 지키신 분입니다. 망국의 슬픔을 탄식하시면서 27일 동안 단식을 단행하시다가 순국하신 애국선열입니다. 오직 대한 독립을 염원하신 애국열사 일유제 선생의 숭고한 사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지역 유림이 중심이 되어 사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정부에서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서강사의 일유재 장태수 선생은 송재 장현식선생의 증조부가 되신다.
松齋 張鉉植 先生 記績碑(송재 장현식 선생 기적비)
松齋 張鉉植 先生 記績碑(송재 장현식 선생 기적비)
항일 독립운동 애국지사이신 송재 장현식 선생은 이곳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서 1896년 9월 17일 아버지 인동 장씨 석규공과 어머니 울산 김씨의 독자로 태어나셨습니다.
송재 선생은 명문 종가의 종손으로 만석꾼 부호의 재산을 일가의 부귀영화를 위해 쓰지 않고 항일독립운동에 쾌척하신 애국지사이셨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과 민족언론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소신으로 육영사업과 언론기관 설립에 앞장서셨습니다.
망국의 비운 속에서도 민족의 얼인 우리말을 지켜야한다는 신념으로 일제의 모진 고문과 옥고를 불사하고 우리말 수호운동에 적극 참여한 투철한 민족주의자이셨습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창기에는 제 2대 전북지사로 도정의 기초와 기틀을 다지는데 헌신하셨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6.25 동란 중 납북된 후 북한 땅에 영면해 계십니다.
경술국치에 항거, 27일간 단식 끝에 순국하신 일유재 장태수 일유재 장태수 선생이 송재 선생의 종증조부되십니다. 여기 우리 전북도민들의 뜻을 모아 일유재
선생의 사당 서강사 경내에 송재 선생의 기적비를 세워 선생의 공적을 오래 오래 기리고 일유재 선생과 송재 선생 두 분의 충의정신을 현양하고자 합니다.
2019년 5월 전라북도 도지사 취석 송하진 글을 짓고 쓰다
애국지사 송재 장현식(松齋 張鉉植) 선생 약전
애국지사 송재 장현식(松齋 張鉉植) 선생 약전
선생은 인동 장씨 시조 금용공의 30대 손이요. 여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 송은 안세공의 19대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서 진안 현감을 지내고 이곳 서도리를 세거지로 정한 중조 진안 기건공의 17대손이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의분이 받쳐 단식 절사하신 일유재 장태수 선생의 종증손이다. 사종원 부경으로 고종을 최측근에서 모셨던 일유재 선생은 장성하는 송재 선생에게 "하늘을 우러러보아, 땅을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훈도하셨다고 한다. 당시 15세이던 송재 선생은 자신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신 종증조부께서 단식 순국하시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항일독립의 유지를 이어 받들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송재 선생이 이곳 서도리 입구에 송은공과 일유재 선생을 봉제사하기 위해 서강사를 지은 것도 조상의 충의정신을 명심물망하고 자신의 항일 독립의지를 다짐하기 위한 것이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에서 거족적으로 전개되고 있을때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그해 4월 지하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이 결성되었다. 그 때 23세의 송재 선생은 대담하게도 3천원이라는 거금을 대동단에 내놓았다. 이 중 1천5백원은 대동단 운영에 쓰였고 나머지 1천5백원은 중국 상해로 보내져 신규식 선생이 주관한 '독립'이라는 출판물 발행에 쓰였다. 선생은 계속 '대동신문'의 재정을 담당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져 선생은 일경에 체포됐고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대동단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 계획했으나 중국으로 가는 도중 의친왕이 일경에 붙잡혀 수포로 돌아갔다. 그후 일제의 검거 선풍이 불어 다수 단원이 투옥됐고 결국 이 비밀결사는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대동단은 항일독립투쟁 역사상 특기해야할 전국적인 규모의 최대 조직이었다.
대동단의거로 옥고를 치른 송재 선생은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선생 등과 가까이 교유하면서 구국과 독립을 위해서는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민족사학을 일으켜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햇다. 선생은 중앙고보(중앙고등학교 전신) 교사 증개축과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전신) 본관 도서관 신축에 인촌 버금가는 기금을 헌납했다. 또한 1920년 전국 각지 애국지사들과 독지가들의 발기로 '조선민족의 표현기관'으로서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도 최상위로 설립자금을 기부, 민족언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창간 이후 17년간 동아일보 감사로 재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