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운 순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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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 262-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또 그 옆에는 이상운 학생 순의비가 서 있었다.

이상운학생 순의비
이상운 학생은 1927.3.26일 생으로 충북 청원 출신이다. 1943년 이리농림학교 2학년 떄 동교생 장지환, 김구, 호중기, 김직수, 서기용, 박기춘, 강동석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항일결사 화랑회를 조직하고, 동회의 대표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행동방략은 우선 총기 및 폭약등을 탈취하여 무장을 갖춘 후 주재소 및 경찰서를 습격하고, 또 만경교를 폭파함으로써 일제의 수탈경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그 첫 번째 계획으로 폭약및 총기를 탈취하기 위해 김제군 금구면 오산리에 있는 20여명이 광산에 잠입하였으나 일경의 삼엄한 경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화랑회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1945년 4월 4일에 전회원이 피체되었다. 피체후 그는 일경의 혹독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다른 회원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끝까지 항거하다가 1945년 7월 17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애국지사 화랑회 이상운의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이리농림동창회에서는 1984년 8월 10일 3.4M 규모로 순의비를 건립하였다.
이상운 학생 순의비
이상운 학생은 1927.3.26일 생으로 충북 청원 출신이다. 1943년 이리농림학교 2학년 떄 동교생 장지환, 김구, 호중기, 김직수, 서기용, 박기춘, 강동석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항일결사 화랑회를 조직하고, 동회의 대표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행동방략은 우선 총기 및 폭약등을 탈취하여 무장을 갖춘 후 주재소 및 경찰서를 습격하고, 또 만경교를 폭파함으로써 일제의 수탈경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그 첫 번째 계획으로 폭약및 총기를 탈취하기 위해 김제군 금구면 오산리에 있는 20여명이 광산에 잠입하였으나 일경의 삼엄한 경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화랑회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1945년 4월 4일에 전회원이 피체되었다. 피체후 그는 일경의 혹독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다른 회원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끝까지 항거하다가 1945년 7월 17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애국지사 화랑회 이상운의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이리농림동창회에서는 1984년 8월 10일 3.4M 규모로 순의비를 건립하였다.
무릇 나라가 이민족 침략하의 위기에 처해있을때 선뜻 목숨을 바쳐 애국의 표상이 되기란 그리 쉬운 용기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살려면 죽고 죽음을 무릅쓴 이 살아남는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의사는 1927년 3월 6일생이다. 아버지 전의이씨 한필, 어머니 민순이 사이의 4남매가운데 차남이다. 김제 중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리 농림학교에 재학중인 때다. 일제의 발악이 절정에 이른 1945년 4월 17일에 이의사는 동지들과 함께 김제 경찰서에 구금되고 만다. 이 동지들은 이 의사가 조직한 화랑회의 장지환, 김구, 김영준, 호중기, 서기용, 김봉수, 강동석, 박기춘 거사에 혼연히 동지애로 합류한 바 있는 독립당의 장이규, 김직수, 김환용등의 이리농림학교의 선후배 재학동지와 기타 김해룡, 김재두, 이종문이다. 1943년 5월 17일 밤에 금구면에 있는 일인 경영의 고깔봉 광산과 금구면 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와 차량을 마련하고 김제 경찰서를 습격한 다음에는 목천포 철교를 파괴
하여 국내외의 항일운동을 촉진하려던 거사였는데 불행하게도 그 전날에 고깔봉 광산에서 살인사건이 났기때문에 잠복하고 있던 일경의 비상망을 뚫지 못하여 부득이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물러서서 차기를 약속하고 최대성과를 거두기 위하여 철저한 점조직으로 수십명의 동지를 더 모았고, 약간의 무기도 준비한채 개뱔적 연락으로 대사를 의논하던 차 였다.동지가운데 배신한 사람은 없고 일경의 주구로 형사부장이었던 김모, 양모등 한인의 친일적 감지에서 유발된 탄로였을 뿐이다. 모두 심한 고문에 빈사상태에 이르고 말았는데 특히 이의사는 심한 매질로 말미암아 회생 불능상태에 이르자 1945년 7월 17일에 지정된 신풍의원 진료대에 채 오르기도 전에 강심제마저 아랑곳없이 못다핀 한의 생애를 마친것이다. 이의사는 육당의 고사통을 정독하면서부터 더욱 역사의식이 투철한 애국학생으로 발심하게 되었다 한다. 늘상 비장한 거사를 설득함에 있어서 이의사는 감자는 제몸을 썩혀 없애가며 새싹을 키운다. 우리는 조국을 소생시키는 이미 감자가 되자라는 구호를 외치곤 하였다. 이의사가 이끌던 화랑회사건은 광복이 되면서 불굴의 애국정신으로 칭송받고 이농의 선후배들은 이와같은 순수한 애국활동이 모교에서 있었다는 높은 자부와 긍지를 가지고 화랑은 살아있다라는 연극을 만들어 공연한 바도 있다. 주제는 모든 거사의 책임을 이의사의 자기 희생으로 감내한 점을 높이 산것이다. 유족으로 아우 상태는 오옥자와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의사의 하늘을 받든느 기둥같은 투지와 애국심을 길이 이나라 젊은이의 귀감으로 삼고 오랜 빛과 말씀으로 받들고자 하는 정성으로 이에 사료와 들은 바를 가려서 적어 경개하기를 위와 같이 한다. 김제군수 최봉규및 지역사회 유지와 유족의 뜻을 함께하여 비를 세우기에 앞서 문학박사 이병기는 글을 짓고 청암 이상록은 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