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서수면 서수리 1085-1
- 탐방로그
- 1995년 6월 17일 군산시 서수면민들이 뜻을 모아 항일항쟁의 발원지인 임피중학교 앞뜰에 기념비를 건립하고 항일투쟁 34명의 명단을 각인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
옥구농민의 소작쟁의(小作爭議 1927.8.9 ~ 1928.9.29)는 군옥지방의 3.1운동의 연장이요 집단적인 항일운동은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도전이요 조직적인 항쟁은 독립운동이다.
- 옥구농민의 항일 항쟁사에서 -
이 곳은 일제시대의 악질지주의 대표적인 이엽사(李葉社) 농장의 옛터... 옥구(서수) 농민들이 항일 항쟁한 애국지사들의 얼이 살아있는 "옥구 농민 항일 항쟁 기념비"가 있는 성지이다.
옥구농민의 소작쟁의(小作爭議 1927.8.9 ~ 1928.9.29)는 군옥지방의 3.1운동의 연장이요 집단적인 항일운동은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도전이요 조직적인 항쟁은 독립운동이다.
- 옥구농민의 항일 항쟁사에서 -
이 곳은 일제시대의 악질지주의 대표적인 이엽사(李葉社) 농장의 옛터... 옥구(서수) 농민들이 항일 항쟁한 애국지사들의 얼이 살아있는 "옥구 농민 항일 항쟁 기념비"가 있는 성지이다.
여기는 일본에서도 전제적 경영방식으로 악명 높은 니가타현(新潟) 출신 농장주들이 1905년 설치한 가와사키(川崎)농장을 모체로 1926년 공동경영의 대농장을 만든 이엽사(二葉社)농장의 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일제의 수탈체제 속에서 봉건예속농민으로 전락한 소작농민들의 배일항쟁은 1919년부터 1939년 법령으로 소작쟁의가 봉쇄될때까지 전국적으로 140,969건 전북만도 21,730건의 크고 작은 농민항쟁이 있었다. 그 많은 쟁의 중 가장 큰 규모의 항거가 바로 우리 고장에서 일어난 옥구농민 소작쟁의이다.
일제의 수탈체제 속에서 봉건예속농민으로 전락한 소작농민들의 배일항쟁은 1919년부터 1939년 법령으로 소작쟁의가 봉쇄될때까지 전국적으로 140,969건 전북만도 21,730건의 크고 작은 농민항쟁이 있었다. 그 많은 쟁의 중 가장 큰 규모의 항거가 바로 우리 고장에서 일어난 옥구농민 소작쟁의이다.
옥구소작쟁의의 진상
1927.11.20 총수확의 7할에서 8할의 가혹한 현물소작료 납부통고를 받은 농민은 이엽사 농장지주의 횡포에 소작료불납동맹으로 대항하였고 11월 24일 농민조합대표를 검거한 왜경의 개입에 200여명의 농민이 합세하여 왜경을 난타하고 구금 중인 대표의 포승을절단 탈환하였다. 여기에 군산경찰서는 형사대를 총동원하여 농민조합간부 36명을 모조리 검거하였다.이에 흥분한 농민들은 11월 25일밤 징을 울려 총동원 500여명이 합세 서수와 임피의 왜경주재소를 습격 사무실을 파괴하고 만세를 고창하면서 전원을 탈취하였다. 이에 당황한 왜경은 서원을 비상소집하여 구금자 전원을 다시 검거 군산서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500여 농민은 경찰서로 몰려가 구금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자 소방차를 동원 강제 해산시키고 소작인 대표 80여명을 추가 검거하였다. 그 후 왜경은 혹독한 고문으로 1928.12.8 총 검거자 중 51명을 소요 및 구금자 탈환죄로 군산검사국에 송치하고 검사국은 송치자 중 34명을 기소하였다. 협박 명예훼손 죄와 구금자 탈환 죄를 적용한 소작인 34명의 구형공판은 1928.2.10 있었고 선고공판은 1928.2.28 있었다. 최고 1년에서 최하 4개월의 유죄 판결이 선고된 항일투사는 다음과 같다.
장태성 오승철 정영운 이성순
신문관 한기석 김기술 이기열
이진섭 최봉엽 김행규 복만길
김준철 이용선 오요섭 이성춘
이광순 이용덕 최은엽 오남룡
김택현 서가마 이영출 이원섭
이효남 윤경문 이진철 서만석
문일만 채판진 이휴춘 이정춘
이보동 김재풍 이상 34명
1994. 12
1927.11.20 총수확의 7할에서 8할의 가혹한 현물소작료 납부통고를 받은 농민은 이엽사 농장지주의 횡포에 소작료불납동맹으로 대항하였고 11월 24일 농민조합대표를 검거한 왜경의 개입에 200여명의 농민이 합세하여 왜경을 난타하고 구금 중인 대표의 포승을절단 탈환하였다. 여기에 군산경찰서는 형사대를 총동원하여 농민조합간부 36명을 모조리 검거하였다.이에 흥분한 농민들은 11월 25일밤 징을 울려 총동원 500여명이 합세 서수와 임피의 왜경주재소를 습격 사무실을 파괴하고 만세를 고창하면서 전원을 탈취하였다. 이에 당황한 왜경은 서원을 비상소집하여 구금자 전원을 다시 검거 군산서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500여 농민은 경찰서로 몰려가 구금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자 소방차를 동원 강제 해산시키고 소작인 대표 80여명을 추가 검거하였다. 그 후 왜경은 혹독한 고문으로 1928.12.8 총 검거자 중 51명을 소요 및 구금자 탈환죄로 군산검사국에 송치하고 검사국은 송치자 중 34명을 기소하였다. 협박 명예훼손 죄와 구금자 탈환 죄를 적용한 소작인 34명의 구형공판은 1928.2.10 있었고 선고공판은 1928.2.28 있었다. 최고 1년에서 최하 4개월의 유죄 판결이 선고된 항일투사는 다음과 같다.
장태성 오승철 정영운 이성순
신문관 한기석 김기술 이기열
이진섭 최봉엽 김행규 복만길
김준철 이용선 오요섭 이성춘
이광순 이용덕 최은엽 오남룡
김택현 서가마 이영출 이원섭
이효남 윤경문 이진철 서만석
문일만 채판진 이휴춘 이정춘
이보동 김재풍 이상 34명
1994. 12
전북 군산시 서수면 서수리 1085-1 임피중학교
임피중학교 정문 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