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남 최초 3.1운동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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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 470-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군산3.1만세운동은 28회(31,500여 명 참여/피살자 53명/부상자 72명/투옥자 195명)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당시 일본 군대가 주둔하고 있든 일본인 득세 중심의 도시 속에서 자주독립의 확고한 의지를 힘있게 알리며 꽃피운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은 자랑스런 우리고장 군산의 불씨가 되었던 거사다. 이로 인해 대구복심법원에서 군산 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교사 4명, 학생 11명, 병원 사무원 9명, 교회신자 2명, 시민 8명)
세계사에 길이 빛나는 우리민족 운동인 3.1운동, 자랑스런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의 발상지이며 당시 신문화를 주도했고 군산팔경 중 한 곳 궁포귀범(弓浦歸帆)인 이 곳, 구암동산을 후손들에게 살아 숨쉬는 역사의 교육장으로 성역화하여 애국애족의 숭고한 깊은 뜻을 높이 기리며 계속 받들고 이어 나가고자 한다.
2015년 3월 1일 국가보훈처(익산보훈지청).군산시.군산3.1만세운동기념사업회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장 권율정 감수
구암동산을 찾았다.
우리 고장 군산의 3.1 운동사
병자수호조약(1876년)으로부터 23년 후, 1899년 5월 1일 군산이 개항되었다. 11년 후 한일합방(1910년)이 되었고, 그 여세로 인해 군산은 일본인 득세의 독점도시가 되고 말았다. 쌀 수출의 수송 증가로 1914년 군산은 전국 제1의 수출항이 되어 비극적인 일제의 쌀 착취장소로 변해 버렸다. 1919년에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228명이나 더 살고 있는 일본인 도시화가 되었고, 1920년에는 일제 식민정책의 식량 및 원료 생산지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군산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천시와 수모의 핍박 속에서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입국한 美남장로교 7인의 선교사들 중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한국명 : 전위렴) 선교사 부부와 의료선교사 드 루(Dr. A.Damer Drew/한국명 : 유대모) 선교사 부부의 군산 선교스테이션이 충청도와 호남지역의 선교지 교두보로 궁멀(현 구암동)의 구암동산에 형성되어, 그 규모나 조직면에서 외세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할 수 있는 여건들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1세대들이 교사가 되어 교단을 지키며 나라사랑의 뿌리를 둔 항일항쟁이 시작되었다.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 군산 선교스테이션 / Gunsan Mission Station : 구암동산을 중심으로 교회, 소학교, 영명 남학교, 멜본딘 여학교, 병원, 선교사 사택, 성경학당 및 각종 숙소 등이 세워져서 군산의 신문화를 주도하였고 근산 근대문화의 발원지가 되었던 곳

군산3.1만세운동은 김병수(군산영명학교 졸업/당시 세브란스 의전학생)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 선언서" 200여매를 전달받아 군산 영명학교 스승인 박연세, 이두열에게 1919년 2월 28일에 전달함으로써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시작되었다.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3,500매) 복사와 태극기(수백 장)를 그리고 만드는 작업을 비밀리에 착수하여 3월 6일(음력 2월 5일) 설에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영명학교 전교직원, 전교생, 구암병원 사무원, 신자들과 일반 시민까지 모두 참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전모임의 결의와 준비로 3월 4일까지 거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으나, 돌연 3월 4일 새벽 군산경찰서의 일본인 무장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송정헌 등을 구인(拘引)하는 바람에 사전 발각되어 좌절될 뻔 하였다. 그러나, 김윤실 교사를 중심으로 격분한 학생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3월 4일에 잡혀간 교사들의 석방을 위한 시위가 첫 만세 시위 운동이었다.일본 경찰이 1차 학생시위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유치한 후, 방심하는 사이 3월 4일의 만세시위 진압이 자극제가 되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에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그 규모는 컸었다. 주로 학생들에 의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고, 체포를 면한 기독교 학교인 영명 남학교, 멜본딘 여학교 교사와 학생, 구암 예수병원 사무원, 구암교회 교인 등이 합세하면서, 백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500여 명으로 늘어나 성난 노도와 같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계속되었다.
군산3.1만세운동은 28회(31,500여 명 참여/피살자 53명/부상자 72명/투옥자 195명)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당시 일본 군대가 주둔하고 있든 일본인 득세 중심의 도시 속에서 자주독립의 확고한 의지를 힘있게 알리며 꽃피운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은 자랑스런 우리고장 군산의 불씨가 되었던 거사다. 이로 인해 대구복심법원에서 군산 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교사 4명, 학생 11명, 병원 사무원 9명, 교회신자 2명, 시민 8명)
세계사에 길이 빛나는 우리민족 운동인 3.1운동, 자랑스런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의 발상지이며 당시 신문화를 주도했고 군산팔경 중 한 곳 궁포귀범(弓浦歸帆)인 이 곳, 구암동산을 후손들에게 살아 숨쉬는 역사의 교육장으로 성역화하여 애국애족의 숭고한 깊은 뜻을 높이 기리며 계속 받들고 이어 나가고자 한다.
2015년 3월 1일 국가보훈처(익산보훈지청).군산시.군산3.1만세운동기념사업회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장 권율정 감수
한강이남 최최의 3.1운동 발상지
한강이남 최최의 3.1운동 발상지
우리 고장 군산의 3.1 운동사
병자수호조약(1876년)으로부터 23년 후, 1899년 5월 1일 군산이 개항되었다. 11년 후 한일합방(1910년)이 되었고, 그 여세로 인해 군산은 일본인 득세의 독점도시가 되고 말았다. 쌀 수출의 수송 증가로 1914년 군산은 전국 제1의 수출항이 되어 비극적인 일제의 쌀 착취장소로 변해 버렸다. 1919년에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228명이나 더 살고 있는 일본인 도시화가 되었고, 1920년에는 일제 식민정책의 식량 및 원료 생산지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군산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천시와 수모의 핍박 속에서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입국한 美남장로교 7인의 선교사들 중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한국명 : 전위렴) 선교사 부부와 의료선교사 드 루(Dr. A.Damer Drew/한국명 : 유대모) 선교사 부부의 군산 선교스테이션이 충청도와 호남지역의 선교지 교두보로 궁멀(현 구암동)의 구암동산에 형성되어, 그 규모나 조직면에서 외세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할 수 있는 여건들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1세대들이 교사가 되어 교단을 지키며 나라사랑의 뿌리를 둔 항일항쟁이 시작되었다.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1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 군산 선교스테이션 / Gunsan Mission Station : 구암동산을 중심으로 교회, 소학교, 영명 남학교, 멜본딘 여학교, 병원, 선교사 사택, 성경학당 및 각종 숙소 등이 세워져서 군산의 신문화를 주도하였고 근산 근대문화의 발원지가 되었던 곳
군산3.1만세운동은 김병수(군산영명학교 졸업/당시 세브란스 의전학생)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 선언서" 200여매를 전달받아 군산 영명학교 스승인 박연세, 이두열에게 1919년 2월 28일에 전달함으로써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시작되었다.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3,500매) 복사와 태극기(수백 장)를 그리고 만드는 작업을 비밀리에 착수하여 3월 6일(음력 2월 5일) 설에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영명학교 전교직원, 전교생, 구암병원 사무원, 신자들과 일반 시민까지 모두 참가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전모임의 결의와 준비로 3월 4일까지 거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으나, 돌연 3월 4일 새벽 군산경찰서의 일본인 무장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송정헌 등을 구인(拘引)하는 바람에 사전 발각되어 좌절될 뻔 하였다. 그러나, 김윤실 교사를 중심으로 격분한 학생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3월 4일에 잡혀간 교사들의 석방을 위한 시위가 첫 만세 시위 운동이었다.일본 경찰이 1차 학생시위를 진압하고, 주동자를 유치한 후, 방심하는 사이 3월 4일의 만세시위 진압이 자극제가 되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에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그 규모는 컸었다. 주로 학생들에 의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고, 체포를 면한 기독교 학교인 영명 남학교, 멜본딘 여학교 교사와 학생, 구암 예수병원 사무원, 구암교회 교인 등이 합세하면서, 백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는 500여 명으로 늘어나 성난 노도와 같이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