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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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 358-2
탐방로그
군산시 구암동 358-2 새롭게 건립된 군산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을 찾았다.
벌써 이곳은 4번째이다. 구암역사공원 시작 전, 공사 중일 때, 탑이 제막되었을 때...
앞선 탐방시에는 저곳에 건물은 없고, 한강이남 최초의 3.1운동발상지 조형물만 있었는데...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구암교회옆에는 3.1운동기념비가 건립되어있다. 자세한것은 아래 탐방앨범을 보시길
앞선 탐방시에는 저곳에 건물은 없고, 한강이남 최초의 3.1운동발상지 조형물만 있었는데...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구암 3.1 전시장 위치도
과거 탐방했었던 한강이남 최초3.1운동발상지 조형물이 충혼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미년 3.5 그날을 기억하다
그날을 기억하다
한강 이남 최초 만세운동인 군산 3.5만세운동 - 그 현장에서 펄럭이던 태극기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리듬감 있게 표현하였고, 태극 문양을 명암으로 표현하여 태극 물결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한 작품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
독립만세운동의 상징인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를 통해 만세운동의 의의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작품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군산 3.1운동 기념관 / 관리번호 : 51-1-48 / 관리자 : 군산시장
건립취지 및 배경 - 이곳은 의사이며 선교사인 전킨(W.M.Junkin, 한국이름 : 전 위렴)이 1885년 군산에 정착하여, 1888년에 구암교회와 구암예수 병원이 설립된 곳으로 1903년에는 영명학교를 설립하여 복음, 의학, 신문학, 교육 등 근대교육사업이 이루어진 장소이다.
또한, 선교사업과 교육 사업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린 군산지역 3.1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군산시 3.1만세운동 - 1919. 3. 5 최초 시작) 군산시에서는 애국.애족의 순교 순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장소인 옛 구암교회를 2007년에 매입하여 독립기념관을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독립운동사의 개관, 군산지역 만세운동 약사, 1910년대에 사용한 성경과 강도 요령 교서 등 민족사와 선교역사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자라나는 학생들이 역사적 산물을 보고 깨우침으로써 독립정신을 배우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고, 후손들에게 1919년 일본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역사적 장소를 관람하면서 선열들이 희생정신과 자주민족 정신을 본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7월말까지 군산시의 독립유공자 사진전시회를 한다고해서 기대를 하고 왔었는데.. 아쉽다.
군산 3.5 만세운동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민중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고, 인물상에서 표현하지 못한 많은 참여자들을 태극기로 표현하여 현장감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한 작품
동상들도 마스크를 쓰고 있다.
구암교회로 내려가는 길에 올라올때 보지못했던 애국지사 소개 안내판이 있었다.
김병수(金炳洙) / 1898. 10. 18. ~ 1951. 5. 22.
군산 영명학교 출신인 김범수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25일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군산 지역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라는 권유와 함께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고 이튿날 군산에 도착하였다. 이후 김범수는 스승인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 박연세(朴淵世)의 집에서 고석주(高錫柱), 김수영(金洙榮), 이동욱(李東旭), 이두열(李斗烈) 등과 만나 서울의 만세운동 계획을 알렸다. 또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여 주민에게 나누어 주도록 함으로써 3월 5일 군산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박연세(朴淵世) / 1883. 4. 9. ~ 1944. 2. 15.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로서 제자인 김병수로부터 서울의 독립운동에 관한 동향과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동료교사 고석주(高錫柱), 김수영(金洙榮), 이동욱(李東旭), 이두열(李斗烈) 등과 함께 군산 장날인 3월 6일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에 대비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였으나, 거사 전날인 3월 5일에 시위계획을 알게 된 군산경찰에 의해서 이두열, 김수영과 함께 연행되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 계획보다 하루 앞당겨 군산의 학생과 시민의 힘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박연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6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고석주(高錫柱) / 1867~미상
전북 옥구(沃溝) 사람으로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김병수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전해지면서 동료교사들과 함께 군산(群山) 장날인 3월 6일에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거사 전날 만세운동 계획이 발각되어 교사들이 연행되자 3월 5일 학생과 주민, 기독교신도 등 500여명과 함께 시내를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시위자 일부는 경찰서 앞에서 구속된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시위자들을 잡아 가두고 영명학교와 예배당을 수색하였다. 이때 염영학교에서 독립선언서가 발견되어 송정헌(宋正憲).양성도(梁成道)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되었다.
홍천경(洪天敬) / 1899. 1. 8. ~ 1990. 6. 29.
전북 옥구(沃溝) 사람으로 당시 영명학교 학생이면서 구암교회 교인으로 동료 학생 및 교사들과 3월 6일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협의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전날인 3월 5일, 박연세와 영명학교 교사들이 일본경찰에 잡혀감으로써 만세운동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홍천경을 비롯한 학생들이 앞장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행진하였다. 이때 기독교 신자와 여학교 학생까지 힘을 더하고 주민들도 함께 나섰으나, 일본경찰과 이리(裡里) 주재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검거되고 시위군중이 해산되었다. 홍천경은 이때 체포되어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강문호(康文昊) / 1899. 3. 9. ~ 1986. 7. 12.
제주도 남제주(南濟州) 사람으로 당시 군산 영명학교 학생이었으며 1919년 3월 5일 만세운동과 3월 31일 재판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다. 3월 31일 3.5 만세운동 때 체포된 30여명의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와 학생들이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재판을 받은 날이었다. 강문호는 이날 재판과정을 보기 위하여 방청석에 앉아있었다. 30여명의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재판장으로 끌려 들어오는 순간, 존경하던 선생님과 학우들이 묶여 들어오는 광경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많은 방청객들이 이에 호응하여 재판장은 순식간에 만세소리로 가득하였고, 결국 체포되어 고등법원에서 법정 소란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군산시 구암동 358-2 에 군산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을 찾으러 왔다.
구암교회
1890년대 초 미국 남장로 교회에서 파송된 7인의 선교사 중 한명인 전킨(Junkin, 한국명 전위렴, 군산 구암교회 1대 목사)과 드루(Adamer D. Drew, 한국명 위대모) 선교사, 이들의 어학 선생인 장인택 등에 의해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군산항 인근에서 생활하며 전도를 하였으나 일본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9년 12월 19일 군산교회로 불리던 군산 선교부와 데이비스 여선교사의 궁멀 기도처와 합병하여 오늘날 구암동산(궁멀, 엣 군산선교 스테이션)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1959년에는 석조건물을 신축하여 교회의 예배당으로 이용하였다.
본 교회의 역사에 의해 안락 소학교(지금의 구암 초등학교), 군산영명학교(지금의 제일 중.고등학교), 멜본딘 여학교(지금의 영광 여자 중고등학교), 구암 예수병원(프렌시스 브리지 얏킨슨 기념 병원) 등으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는 옛 구암 예수병원 직원 숙소 자리에 '호남 선교 기념 예배당'으로도 불리는 군산 구암교회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명학교
1902년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전킨(Junkin, 한국명 전위렴)이 구암동에 설립하였다. 1904년 소학교와 중학교를 분리하여 중학교를 영명학교라고 불렀으며, 1909년 특별과와 고등과를 세우고 군산 영명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19년 3월 5일에는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영명학교가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자 일제는 이에 대한 탄압으로 특별과를 없애고 고등과를 중단시키기도 했으며, 1940년 10월 일본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 하였다. 이후 1952년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군산노회에서 군산영명고등학교를 다시 세우고, 1965년 4월 21일 야간부와 영광 여자 중고등학교(당시 멜본딘 여중고)가 분리 독립하여 이전하였다. 재정난 등의 어려움을 겪던 영명고등학교는 1975년에 군산 지역의 기업가인 고판남이 인수하여 군산 제일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오늘날까지 군산 지역의 고등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군산 3.1운동 역사공원
3.1운동 역사 영상관 /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군산 3.1운동 기념관 / 관리번호 : 51-1-48 / 관리자 : 군산시장
건립취지 및 배경 - 이곳은 의사이며 선교사인 전킨(W.M.Junkin, 한국이름 : 전 위렴)이 1885년 군산에 정착하여, 1888년에 구암교회와 구암예수 병원이 설립된 곳으로 1903년에는 영명학교를 설립하여 복음, 의학, 신문학, 교육 등 근대교육사업이 이루어진 장소이다.
또한, 선교사업과 교육 사업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린 군산지역 3.1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군산시 3.1만세운동 - 1919. 3. 5 최초 시작) 군산시에서는 애국.애족의 순교 순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장소인 옛 구암교회를 2007년에 매입하여 독립기념관을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독립운동사의 개관, 군산지역 만세운동 약사, 1910년대에 사용한 성경과 강도 요령 교서 등 민족사와 선교역사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자라나는 학생들이 역사적 산물을 보고 깨우침으로써 독립정신을 배우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고, 후손들에게 1919년 일본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던 역사적 장소를 관람하면서 선열들이 희생정신과 자주민족 정신을 본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예전에는 저곳이 3.1운동기념관이었다.
구암교회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 선교사(1865-1908)
1892년 11월 3일 - 전위렴(군산에서 궁멀전씨로 개명) 목사 외 6명 제물포 입국
1899년 12월 19일 - 구암동 ㄱ자형 교회와 지경교회, 개복교회 외 회남의 많은 교회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
1902년 3월 - 군산 호남 선교 스테이션 창설 이후, 영명학교(현 제일고교), 멜볼딘 여학교(현 영광여중.고)로 발전했다.
위 학교들은 조선의 민족주의 교육과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구암교회의 시작과 3.5 만세운동 참여
1899년 12월 19일 - 군산 선교스테이션 계획에 따라 ㄱ자형 교회 시작
1919년 2월 -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에 의해 3.1 독립만세운동 계획
1919년 3월 5일 - 호남 최초로 3.1 만세운동을 주동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