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 33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병수,고석진,강문호,문용기,오덕근, 유관순,유장렬,안창호
박연세,신채호, 손병희, 임병찬, 최익현, 홍범도
독립운동가 문용기의 피 묻은 두루마기
1919년 3.1운동 만세세위 참가당시 입었던 두루마기이다. 문용기는 전북 익산출생으로 군상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리역전에서 개최된 익산군민대회에서 연설, 대한독립을 위해 궐기할것을 호소하던중 일본경찰의 칼에 오른손을 잃었다. 이에 왼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전진하자, 다신 왼손을 절단당했으나 굴하지 않고 맨몸으로 군중을 지도하다가 일본경찰의 칼에 찔려 순국했다.
문용기열사의 순국열사 충혼비 앨범도 같이 보시길...
전북 익산시 여산독립만세운동기념비, 가람 이병기선생생가, 의병장 오하 이규홍 묘, 화랑 이상운의사추모비, 순국열사비, 매곡사, 백산서원
1919년 3.1운동 만세세위 참가당시 입었던 두루마기이다. 문용기는 전북 익산출생으로 군상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리역전에서 개최된 익산군민대회에서 연설, 대한독립을 위해 궐기할것을 호소하던중 일본경찰의 칼에 오른손을 잃었다. 이에 왼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전진하자, 다신 왼손을 절단당했으나 굴하지 않고 맨몸으로 군중을 지도하다가 일본경찰의 칼에 찔려 순국했다.
문용기열사의 순국열사 충혼비 앨범도 같이 보시길...
전북 익산시 여산독립만세운동기념비, 가람 이병기선생생가, 의병장 오하 이규홍 묘, 화랑 이상운의사추모비, 순국열사비, 매곡사, 백산서원
독립군배지
독립운동가 안병무가 착용했던 배지이다. 총4점으로 나뭇잎 받침위에 별모양이 있는것(금색), 둥근 틀안에 별모양이 있고 광(光)아러 써져있는것, "KAL"써져있고 가운데에 삼각형이 빨간색으로 채색되어있는것, 가운데에 작은 별모앙이 그려져 있고 그 위로는 "한국광복군", 그 밑으로는 "총사령부"라 써져 있는것들이 있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임시수도 중경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이다. 임시정부는 1937년 광복군 창설계획을 수립했으나, 중일전쟁 발발로 지연되어 1940년에 비로소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을 보게되었다. 1941년 11월 중국정부는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을 만들어 군사원조에 동의하는 한편, 한국광복군 행동준수 9개항을 만들어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고자 했다. 1942년 4월 20일 김원봉의 조선의용군이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어 광복군은 2개지대로 개펴되었다. 제1지대 지대장은 김원봉, 2지대 지대장은 이범석이 맡았다.
독립운동가 안병무가 착용했던 배지이다. 총4점으로 나뭇잎 받침위에 별모양이 있는것(금색), 둥근 틀안에 별모양이 있고 광(光)아러 써져있는것, "KAL"써져있고 가운데에 삼각형이 빨간색으로 채색되어있는것, 가운데에 작은 별모앙이 그려져 있고 그 위로는 "한국광복군", 그 밑으로는 "총사령부"라 써져 있는것들이 있다.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임시수도 중경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이다. 임시정부는 1937년 광복군 창설계획을 수립했으나, 중일전쟁 발발로 지연되어 1940년에 비로소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을 보게되었다. 1941년 11월 중국정부는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을 만들어 군사원조에 동의하는 한편, 한국광복군 행동준수 9개항을 만들어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고자 했다. 1942년 4월 20일 김원봉의 조선의용군이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어 광복군은 2개지대로 개펴되었다. 제1지대 지대장은 김원봉, 2지대 지대장은 이범석이 맡았다.
전북 군산시 구암동 334 옛 구암교회 군산3.1운동기념관을 찾아가고 있다.
한강이남 호남 최초 3.1독립만세운동 발생 기념
나라사랑 무궁화거리
구암동은 한강이남 호남최초 3.1독립만세운동 발생지로 군산시가 보유하고 있는 역사문화 유산으로써의 가치뿐만아니라 호남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지역으로 사적공작으로 활용과 함께 건전한 정신문화의 창출을 유도하기 위하여 구암동주민이 조성한 무궁화거리입니다.
한강이남 호남 최초 3.1독립만세운동 발생 기념
나라사랑 무궁화거리
구암동은 한강이남 호남최초 3.1독립만세운동 발생지로 군산시가 보유하고 있는 역사문화 유산으로써의 가치뿐만아니라 호남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지역으로 사적공작으로 활용과 함께 건전한 정신문화의 창출을 유도하기 위하여 구암동주민이 조성한 무궁화거리입니다.
군산3.1운동기념비
군산 기미 3.5 독립만세운동 약사
군산시의 기미 3.1독립운동은 당시 군산구암교회 교인으로 군산영명학교(현 제일중.고)를 졸업하고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재학중이던 YMCA회원 김병수 학생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가 민족 33인의 한 분인 이갑성 애국지사로부터 독립선언문 200여매와 태극기를 전달받아 2월 26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당시 구암교회 장로) 교사집에서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김윤관, 김연묵, 이동욱, 문용기 등을 만나 서울의 독립운동을 은밀히 알리고 군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는 것을 협의하였다. 그 후 박연세 교사와 같은 학교 교사들과 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매와 태극기를 많이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3월 6일 서래장날에 일제히 거사를 하며 시위를 하려고 하였는데 3월 5일 새벽 군산경찰서에서 일본인경찰 10명이 무장하고 나타나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등을 연행하는 바람에 거사계획은 좌절될 뻔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당시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활동했던 김윤실 교사는 바로 학생간부들과 긴급회의를 열고 거사가 수포로 돌아가기 전에 당일 시위하기로 결의한 후 학생 양기철, 전세종, 김영후, 송기옥, 이도준, 홍천교, 고준명, 유복섭, 오한길, 강규언, 강인성 등이 앞장서 시위에 들어가니 같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멜본딘(현 군산영광중.고) 여학교의 학생도 합세하며 시위에 동참하게 되고 군산 구암교회 교인 다수와 궁멀(궁을리) 예수병원 사무원 양기준, 이준명, 유한종, 양성도, 김창윤, 송경태,송원경, 임병율, 이진규, 김준관, 이기주, 이재근 등이 합세하였으며 시민 정문선, 김영상, 전종식, 문재봉, 홍종억, 전봉신, 박동근, 임종우, 이병관이 합세함으로 500여명으로 늘어나고 경찰서 앞에 이를 때는 천여명으로 불어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하늘에 사무치게 되었다.
당시 군산시의 인구는 13,604명(한국인 6,581명, 일본인 6,809명, 외국인 214명) 이므로 1,000여명의 시위 군중은 큰 무리라 아니할 수 없다. 군산의 기미 3.5독립만세운동은 1903년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선교회에서 기독교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 교사, 학생, 궁멀 예수병원 사무원과 그리고 구암교회 성도 등 기독교인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어 천주교 불교 등 범종교와 시민 등이 함께 하여 전개하였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은 군산의 구암동산에서 3월 5일 발원되어 끈질기게 이어져 총 28회에 걸쳐 연인원 30,700명이 참가하였고 사망 53, 실종 72, 부상 195명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군산의 3.5독립만세운동은 호남 최초는 물론이고 한강 이남 최초의 거사요, 전북지역 최다수의 순국자가 발생한 전라북도 도민의 자랑이요, 군산 시민의 긍지이며 자존심이다.
군산시의 기미 3.1독립운동은 당시 군산구암교회 교인으로 군산영명학교(현 제일중.고)를 졸업하고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재학중이던 YMCA회원 김병수 학생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가 민족 33인의 한 분인 이갑성 애국지사로부터 독립선언문 200여매와 태극기를 전달받아 2월 26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당시 구암교회 장로) 교사집에서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김윤관, 김연묵, 이동욱, 문용기 등을 만나 서울의 독립운동을 은밀히 알리고 군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는 것을 협의하였다. 그 후 박연세 교사와 같은 학교 교사들과 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매와 태극기를 많이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3월 6일 서래장날에 일제히 거사를 하며 시위를 하려고 하였는데 3월 5일 새벽 군산경찰서에서 일본인경찰 10명이 무장하고 나타나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등을 연행하는 바람에 거사계획은 좌절될 뻔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당시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활동했던 김윤실 교사는 바로 학생간부들과 긴급회의를 열고 거사가 수포로 돌아가기 전에 당일 시위하기로 결의한 후 학생 양기철, 전세종, 김영후, 송기옥, 이도준, 홍천교, 고준명, 유복섭, 오한길, 강규언, 강인성 등이 앞장서 시위에 들어가니 같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멜본딘(현 군산영광중.고) 여학교의 학생도 합세하며 시위에 동참하게 되고 군산 구암교회 교인 다수와 궁멀(궁을리) 예수병원 사무원 양기준, 이준명, 유한종, 양성도, 김창윤, 송경태,송원경, 임병율, 이진규, 김준관, 이기주, 이재근 등이 합세하였으며 시민 정문선, 김영상, 전종식, 문재봉, 홍종억, 전봉신, 박동근, 임종우, 이병관이 합세함으로 500여명으로 늘어나고 경찰서 앞에 이를 때는 천여명으로 불어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하늘에 사무치게 되었다.
당시 군산시의 인구는 13,604명(한국인 6,581명, 일본인 6,809명, 외국인 214명) 이므로 1,000여명의 시위 군중은 큰 무리라 아니할 수 없다. 군산의 기미 3.5독립만세운동은 1903년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선교회에서 기독교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 교사, 학생, 궁멀 예수병원 사무원과 그리고 구암교회 성도 등 기독교인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어 천주교 불교 등 범종교와 시민 등이 함께 하여 전개하였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은 군산의 구암동산에서 3월 5일 발원되어 끈질기게 이어져 총 28회에 걸쳐 연인원 30,700명이 참가하였고 사망 53, 실종 72, 부상 195명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군산의 3.5독립만세운동은 호남 최초는 물론이고 한강 이남 최초의 거사요, 전북지역 최다수의 순국자가 발생한 전라북도 도민의 자랑이요, 군산 시민의 긍지이며 자존심이다.
구암교회
군산 3.1독립운동 사적지 호남선교 100주년 기념 성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