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359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高麗谷(고려곡)
이 바위는 사헌부 장령공 고직이 벼슬을 사직하고 영광에서 서기 1410년에 이곳에 터를 잡아 살면서 고국을 잊지 못하여(현 송암리 제하리) 마을 이름을 고려곡이라 하고 송암리 귓등에 있는 이 바위에 고려곡이라고 각기하였다. 500여년의 세월이 지남에 자획이 희미해졌다. 이 바위를 본 15세손 순진 예진 형제가 이 바위에 고려곡 선적이
이 바위는 사헌부 장령공 고직이 벼슬을 사직하고 영광에서 서기 1410년에 이곳에 터를 잡아 살면서 고국을 잊지 못하여(현 송암리 제하리) 마을 이름을 고려곡이라 하고 송암리 귓등에 있는 이 바위에 고려곡이라고 각기하였다. 500여년의 세월이 지남에 자획이 희미해졌다. 이 바위를 본 15세손 순진 예진 형제가 이 바위에 고려곡 선적이
라 다시 각하고 만취정 고순진 송석정이라 각하였다. 만취정은 마을 앞 모정과 나란히 건립되어 현재는 마을주민이 이용하고 있고 송석정은 바위 옆에 건립되었으나 파정되였다. 이 바위 주변의 경작과 건축으로 인하여 훼손될 위험이 있어 2004년 12월에 송암리 임 359번지 고순진 고예진 형제의 독립의사 추모비가 세워저 있는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서기 2004년(갑신) 12월 20일 장령공파 종친회 회장 고석상 총무 고은규 재무 고남규
장흥백 현손인 종손 장령공 후손 일동
서기 2004년(갑신) 12월 20일 장령공파 종친회 회장 고석상 총무 고은규 재무 고남규
장흥백 현손인 종손 장령공 후손 일동
애국지사 만취 고순진 선생 약전기
선생의 휘는 순진 자는 의경 호는 만취. 전북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379번지에서 부친 가선대부 시청의 장남으로 1863년 청종 계해 음 4월 29일 출생하여 1938(무인) 4월 2일에 76세로 돌아가시다.
ㅇ 수학 : 면암 최익현 선생
ㅇ 관작 : 칙명 종삼품 통훈대부
① 의병보국 - 1905년 10월 15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제 예진 등 3인을 보내어 면암 최익현 선생을 방문하여 호남의거를 헌책하고 1906년 최면암 의거시 항일투쟁을 호소하고 의병궐기의 토왜격문을 인쇄하여 팔도에 포고하다.
② 칙명 - 1914년 2월 구국운동에 공이 많음을 인정하고 고종황제께서 특승종삼품 통훈대부를 명하시다
③ 파리장서운동 - 1919년 3월 23일 3.1만세운동과 별도로 전국유림 137인 연서로 대한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심산 김창숙 밀사를 중국 상해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임정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 파리만국회의에 제출케 하였음
선생의 휘는 순진 자는 의경 호는 만취. 전북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379번지에서 부친 가선대부 시청의 장남으로 1863년 청종 계해 음 4월 29일 출생하여 1938(무인) 4월 2일에 76세로 돌아가시다.
ㅇ 수학 : 면암 최익현 선생
ㅇ 관작 : 칙명 종삼품 통훈대부
① 의병보국 - 1905년 10월 15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제 예진 등 3인을 보내어 면암 최익현 선생을 방문하여 호남의거를 헌책하고 1906년 최면암 의거시 항일투쟁을 호소하고 의병궐기의 토왜격문을 인쇄하여 팔도에 포고하다.
② 칙명 - 1914년 2월 구국운동에 공이 많음을 인정하고 고종황제께서 특승종삼품 통훈대부를 명하시다
③ 파리장서운동 - 1919년 3월 23일 3.1만세운동과 별도로 전국유림 137인 연서로 대한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심산 김창숙 밀사를 중국 상해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임정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 파리만국회의에 제출케 하였음
晩翠 高先生 追慕碑(만취 고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고순진 고예진 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고순진 고예진 두 선생은 부친 가선대부 고시청 선생의 장남과 4남으로 흥덕면 송암리 379번지에서 탄생하다. 두 선생의 숭고한 도학과 위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국내 문인들과 유지들의 발의로 1986년 5월 5일 도지사, 군수, 보훈지청장과 문인 유지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7척 두 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ㅇ 고순진(高舜鎭 1863-1938) 자는 의경(義卿) 호는 만취(晩翠)며 면암 선생의 문인이다. 1906년 면암 의거시 항일투쟁을 호소하고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다. 1914년 무기와 군량미 및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의군부에 헌납하다.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73년 10월 3일 성균관 및 전국 유림단 주최로 서울 장충단공원에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정부 및 각계의 지원으로 건립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제 567호)이 추서되다.
ㅇ 고예진(高禮鎭 1875-1952) 자는 계문(季文) 호는 송천(松川)이니 면암 수남 두선생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족형 고석진 족질 고제만과 3인이 면암 최선생을 방문 호남의거를 헌책하고 1906년 윤4월 면암 선생이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킴에 고석진 김양수 등과 함께 의병 궐기의 토왜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전파하고 순창 전투에서 의병대장 면암 등 12의사가 왜군에 붙잡혀 송천 선생은 전주 감옥에서 수개월의 옥고를 치르다 1914년 광무황제로부터 독립의군무 참모관의 칙명을 받고 전국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의사 곽경열을 통하여 중국 상해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헌납하다.
33인 뒤이은 12지사 1919년 3월 5일 고예진 고석진 선생을 비롯 12명이 선언장서에 연서하여 총독 장고천과 직접 담판하고 종로네거리에서 총독에게 보낸 장서 낭독과 만세를 고창하였고 1919년 프랑스 파리에 만국평화 회의가 개최됨에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전국 유림대표 곽종석 등 137 인연서로 대한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심산 김창숙을 밀사로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임정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 파리 세계평화회의에 제출케하다.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과 함께 고종황제의 칙명장이 상설 전시되다. 건국훈장 애국장(12호)이 추서되고 저서에 송천집 4권이 있다.
애국지사 고순진 고예진 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고순진 고예진 두 선생은 부친 가선대부 고시청 선생의 장남과 4남으로 흥덕면 송암리 379번지에서 탄생하다. 두 선생의 숭고한 도학과 위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국내 문인들과 유지들의 발의로 1986년 5월 5일 도지사, 군수, 보훈지청장과 문인 유지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7척 두 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ㅇ 고순진(高舜鎭 1863-1938) 자는 의경(義卿) 호는 만취(晩翠)며 면암 선생의 문인이다. 1906년 면암 의거시 항일투쟁을 호소하고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다. 1914년 무기와 군량미 및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의군부에 헌납하다.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73년 10월 3일 성균관 및 전국 유림단 주최로 서울 장충단공원에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정부 및 각계의 지원으로 건립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제 567호)이 추서되다.
ㅇ 고예진(高禮鎭 1875-1952) 자는 계문(季文) 호는 송천(松川)이니 면암 수남 두선생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족형 고석진 족질 고제만과 3인이 면암 최선생을 방문 호남의거를 헌책하고 1906년 윤4월 면암 선생이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킴에 고석진 김양수 등과 함께 의병 궐기의 토왜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전파하고 순창 전투에서 의병대장 면암 등 12의사가 왜군에 붙잡혀 송천 선생은 전주 감옥에서 수개월의 옥고를 치르다 1914년 광무황제로부터 독립의군무 참모관의 칙명을 받고 전국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의사 곽경열을 통하여 중국 상해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헌납하다.
33인 뒤이은 12지사 1919년 3월 5일 고예진 고석진 선생을 비롯 12명이 선언장서에 연서하여 총독 장고천과 직접 담판하고 종로네거리에서 총독에게 보낸 장서 낭독과 만세를 고창하였고 1919년 프랑스 파리에 만국평화 회의가 개최됨에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전국 유림대표 곽종석 등 137 인연서로 대한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심산 김창숙을 밀사로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임정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 파리 세계평화회의에 제출케하다.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과 함께 고종황제의 칙명장이 상설 전시되다. 건국훈장 애국장(12호)이 추서되고 저서에 송천집 4권이 있다.
만취 고공 추모비명 병서
동지를 모아 국권 회복을 도모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쳐 학문 부흥을 생각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주사(主事) 만취(晩翠) 고공(高公) 순진(舜鎭)이다. 공의 세계(世系)는 장흥(長興)으로 고려 절신 상서(尙書) 협(協)의 후손 성재(誠齋) 시청(時淸)의 아들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준걸하고 뜻하는 바가 고매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잘 섬기고 아우에게 우애하여 효우(孝友)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선행을 좋아하고 의를 즐겼으며 승낙을 중히 여겨 이익과 손해로 따르고 피하지 않아 신의가 고을에서 믿음을 얻었다. 성품은 굳세고 결단성이 있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일도양단(一刀兩斷)하듯 의리에 맞게 결단하여 남은 것이 없게 하였다.
갑진년(1904)에 승훈랑(承訓郞)을 배수 받고, 을사년(1905)에 혜민원 주사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을사5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국권이 이양되었다. 이때에 면암선생이 남하하여 옥천(玉川)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공은 무기를 사고 돈과 곡식을 비축하여 의병소(義兵所)에 들이고, 아우 예진(禮鎭)으로 하여금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패전하여 면암선생 이 일본 섬에서 순국하니 비통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동지를 모아 면암옹을 뒤에서 도와 책의(翟義)를 다시 경영하였으되 형세가 막히고 힘이 부족하여 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족형 수남 석진(錫鎭) 및 예진(禮鎭)에게 장서를 보내 일본 오랑캐의 억압과 간악한 모습을 폭로하였다. 광무제가 갑자기 붕어하시자 원통하여 침식을 잊고 글을 지어 지역 안에 알려서 교궁(校宮)에 모여 곡(哭)하고, 기일에 맞추어 수남옹을 모시고 상경하여 곡반(哭班)에 참여하여 애통한 마음을 쏟아냈다. 이어서 소(疎)를 올려 방례(邦禮 나라의 의식)와 위호(位號 작위의 등급)가 바르지 않음을 낱낱이 말하였으나 상소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초야에 있지만 마음은 나라에 있어 밤낮으로 혹시라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잊지 않았다. 사설이 더욱 넓어져 우리의 도가 막혀가는 것을 보고 수남옹과 모의하여 고을 자제들을 명륜당에 모아 강석(講席)하는 자리를 크게 열어 경(經)과 예(禮)를 강습하고 여러 학생을 위해 오도(吾道)를 밝히지 않을 수 없으며, 이학(異學)을 배척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자세히 말하였다. 또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여 옛날에 빈흥(賓興)의 뜻과, 손님과 주인이 읍손(揖遜)하는 예절에 대하여 알도록 하였는데 행한지 3년 만에 고을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 도동사(道東祠)를 세워 면암(勉庵), 수남(秀南) 두 선생을 배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향할 곳이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분투하는 뜻이고 큰 업적이니 후인이 칭송하고 사모하는 바이다.
아! 일본 오랑캐가 원수가 되고 사설이 정도를 해치니 이성(彛性)을 대략 갖춘 사람들이 함께 물리쳐야 하거늘 도리어 향풀이 띠풀이 되듯 거침없이 빠져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오직 공은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 시세(時㔟)를 돌아보지 않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의리만 알고 정성과 힘을 다하여 생사를 도외시한 사람이니,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공로가 유학을 보존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림과 문족(門族)들은 공의 풍절이 혹 묻힐까 차마 두고 보지 못하고 사는 곳 종송리(種松里) 마을 입구에 큰 비석을 세우고 사적을 기록하여 추모의 뜻을 깃들였다.
공의 손자 만상(萬相), 필상(滭相)이 사촌 동생 석상(錫相)과 더불어 찾아와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이가 어려 공을 미처 뵙지는 못하였으나 지절(志節)이 높고 덕의가 순수함에 탄복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기쁘게 글을 짓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오랑캐가 국권을 훔침이여/ 힘을 다해 토복하셨네/ 사악한 학설이 정도를 좀먹음이여/ 정성을 다해 유학을 일으키셨네/ 큰 도가 이미 서 있음이여/ 소덕은 생략할 만 하네/ 무리는 시들어도 홀로 푸름이여/ 세한의 절개로다/ 맑은 운치 여기 있음이여/ 크나큰 공을 사모하리/ 우뚝한 큰 비석이여/ 후대에 말할 만 하네/
단기 4318년 을축년(1985) 이른 봄에 거창 신사범(愼思範)은 삼가 짓는다. 손자 사위 흥양 유영석(柳榮錫)은 삼가 쓴다.
동지를 모아 국권 회복을 도모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쳐 학문 부흥을 생각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주사(主事) 만취(晩翠) 고공(高公) 순진(舜鎭)이다. 공의 세계(世系)는 장흥(長興)으로 고려 절신 상서(尙書) 협(協)의 후손 성재(誠齋) 시청(時淸)의 아들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준걸하고 뜻하는 바가 고매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잘 섬기고 아우에게 우애하여 효우(孝友)가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선행을 좋아하고 의를 즐겼으며 승낙을 중히 여겨 이익과 손해로 따르고 피하지 않아 신의가 고을에서 믿음을 얻었다. 성품은 굳세고 결단성이 있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일도양단(一刀兩斷)하듯 의리에 맞게 결단하여 남은 것이 없게 하였다.
갑진년(1904)에 승훈랑(承訓郞)을 배수 받고, 을사년(1905)에 혜민원 주사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을사5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국권이 이양되었다. 이때에 면암선생이 남하하여 옥천(玉川)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공은 무기를 사고 돈과 곡식을 비축하여 의병소(義兵所)에 들이고, 아우 예진(禮鎭)으로 하여금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패전하여 면암선생 이 일본 섬에서 순국하니 비통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동지를 모아 면암옹을 뒤에서 도와 책의(翟義)를 다시 경영하였으되 형세가 막히고 힘이 부족하여 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족형 수남 석진(錫鎭) 및 예진(禮鎭)에게 장서를 보내 일본 오랑캐의 억압과 간악한 모습을 폭로하였다. 광무제가 갑자기 붕어하시자 원통하여 침식을 잊고 글을 지어 지역 안에 알려서 교궁(校宮)에 모여 곡(哭)하고, 기일에 맞추어 수남옹을 모시고 상경하여 곡반(哭班)에 참여하여 애통한 마음을 쏟아냈다. 이어서 소(疎)를 올려 방례(邦禮 나라의 의식)와 위호(位號 작위의 등급)가 바르지 않음을 낱낱이 말하였으나 상소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통곡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초야에 있지만 마음은 나라에 있어 밤낮으로 혹시라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잊지 않았다. 사설이 더욱 넓어져 우리의 도가 막혀가는 것을 보고 수남옹과 모의하여 고을 자제들을 명륜당에 모아 강석(講席)하는 자리를 크게 열어 경(經)과 예(禮)를 강습하고 여러 학생을 위해 오도(吾道)를 밝히지 않을 수 없으며, 이학(異學)을 배척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자세히 말하였다. 또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여 옛날에 빈흥(賓興)의 뜻과, 손님과 주인이 읍손(揖遜)하는 예절에 대하여 알도록 하였는데 행한지 3년 만에 고을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 도동사(道東祠)를 세워 면암(勉庵), 수남(秀南) 두 선생을 배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향할 곳이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분투하는 뜻이고 큰 업적이니 후인이 칭송하고 사모하는 바이다.
아! 일본 오랑캐가 원수가 되고 사설이 정도를 해치니 이성(彛性)을 대략 갖춘 사람들이 함께 물리쳐야 하거늘 도리어 향풀이 띠풀이 되듯 거침없이 빠져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오직 공은 강약을 헤아리지 않고 시세(時㔟)를 돌아보지 않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의리만 알고 정성과 힘을 다하여 생사를 도외시한 사람이니,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공로가 유학을 보존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림과 문족(門族)들은 공의 풍절이 혹 묻힐까 차마 두고 보지 못하고 사는 곳 종송리(種松里) 마을 입구에 큰 비석을 세우고 사적을 기록하여 추모의 뜻을 깃들였다.
공의 손자 만상(萬相), 필상(滭相)이 사촌 동생 석상(錫相)과 더불어 찾아와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이가 어려 공을 미처 뵙지는 못하였으나 지절(志節)이 높고 덕의가 순수함에 탄복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기쁘게 글을 짓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오랑캐가 국권을 훔침이여/ 힘을 다해 토복하셨네/ 사악한 학설이 정도를 좀먹음이여/ 정성을 다해 유학을 일으키셨네/ 큰 도가 이미 서 있음이여/ 소덕은 생략할 만 하네/ 무리는 시들어도 홀로 푸름이여/ 세한의 절개로다/ 맑은 운치 여기 있음이여/ 크나큰 공을 사모하리/ 우뚝한 큰 비석이여/ 후대에 말할 만 하네/
단기 4318년 을축년(1985) 이른 봄에 거창 신사범(愼思範)은 삼가 짓는다. 손자 사위 흥양 유영석(柳榮錫)은 삼가 쓴다.
애국지사 송천 고예진 선생 약전기
선생의 휘는 예진 자는 게문 호는 송천. 전북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379번지에서 부친 가선대부 시청의 4남으로 1875년 고종 을해 음 11월 24일에 낳으시고 1952년 임진 음 10월 12일에 77세로 돌아가시다.
ㅇ 수학 : 수남 고석진 선생 면암 최익현 선생
ㅇ 관작 : 칙명 종삼품 통훈대부
一. 구국운동
① 의병보국 - 1905년(4238) 10월 5일 을사 오조약이 체결되자 족형 고석진 족질 고제만과 3인이 면암 최선생을 방문 호남의거를 헌책하고 1906년(병오) 윤4월에 면암 최선생이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킴에 의병궐기의 토왜격문을 인쇄하여 전국에 전포하고 순창전투에서 의병대장 최면암 등 12의사가 왜군에 붙잡혀 선생은 전주감옥에서 수개월의 옥고를 치르다.
② 칙명 - 1914년(광무 18) 2월 대한제국에서는 구국운동에 공이 많음을 인정하고 고종황제께서 특승종삼품 통훈대부 독립으군부 총무국 서기관을 명하시다.
③ 일제침략규탄상소 - 1919년(4252) 1월 21일(음 무오년 12월 일) 고종황제 인산시 대한문 앞에 모인 전국유림과 함께 일제침략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사황께 올림
④ 파리장서운동 - 1919년 3월 23일 3.1만세운동과 별도로 전국유림 137인 연서로 대한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심산 김창숙 밀사를 중국 상해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임정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회의에 제출케하였음
선생의 휘는 예진 자는 게문 호는 송천. 전북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379번지에서 부친 가선대부 시청의 4남으로 1875년 고종 을해 음 11월 24일에 낳으시고 1952년 임진 음 10월 12일에 77세로 돌아가시다.
ㅇ 수학 : 수남 고석진 선생 면암 최익현 선생
ㅇ 관작 : 칙명 종삼품 통훈대부
一. 구국운동
① 의병보국 - 1905년(4238) 10월 5일 을사 오조약이 체결되자 족형 고석진 족질 고제만과 3인이 면암 최선생을 방문 호남의거를 헌책하고 1906년(병오) 윤4월에 면암 최선생이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킴에 의병궐기의 토왜격문을 인쇄하여 전국에 전포하고 순창전투에서 의병대장 최면암 등 12의사가 왜군에 붙잡혀 선생은 전주감옥에서 수개월의 옥고를 치르다.
② 칙명 - 1914년(광무 18) 2월 대한제국에서는 구국운동에 공이 많음을 인정하고 고종황제께서 특승종삼품 통훈대부 독립으군부 총무국 서기관을 명하시다.
③ 일제침략규탄상소 - 1919년(4252) 1월 21일(음 무오년 12월 일) 고종황제 인산시 대한문 앞에 모인 전국유림과 함께 일제침략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사황께 올림
④ 파리장서운동 - 1919년 3월 23일 3.1만세운동과 별도로 전국유림 137인 연서로 대한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심산 김창숙 밀사를 중국 상해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임정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회의에 제출케하였음
⑤ 군자금헌금 - 김제출신 의사 남촌 곽경열을 통하여 중국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헌납함
二. 강학
일제 식민지 정책이 날로 강화되자 선생은 즐기시던 주초를 끊고 구국 제일의는 문맹퇴치라 여기시고 향리에서 40여년간 수천명의 후학을 양성하였음
三. 추모사업
① 사우 봉안 및 문집 발간 - 1962년(임인) 음10월 사론으로 면암 최익현 수남 고석진 두 선생과 함께 도동사에 추배 봉안하였으며 1963년(계묘) 음9월 문인들에 의해 송천 문집4권이 발간되었음
② 파리장서비 건립 - 1973년(계묘) 10월 3일 성균관 및 전국유림단 주최로 서울 장춘단공원에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정부 및 각계의 지원으로 건립함
③ 국가포장
⒜ 건국포장 - 1977년(정사) 12월 13일 정부는 선생의 구국정신을 숭앙하여 건국포장(제903호)을 추서함
⒝ 건국훈장 애국장 - 1990(경오) 12월 6일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 제123호를 제추서함
④ 묘비건립 - 1984년(갑자) 윤12월 일 보훈당국에 의해 묘비를 건립함
⑤ 추모비 건립
⒜ 1986년(병인) 5월 5일 문인 및 국내 각계 유지들의 후원으로 추모비 및 문인록비를 향리 입구에 건립함
건립위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경한 비문대자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학박사 김동리 비문소자 족손 고광준 추모비 제막식에 도지사 군수 익산보훈지청장 및 국내 문인 유지 등 이천여명이 참석하여 성대한 행사를 하였음
⒝ 2000년 5월 5일 신림면 가평리 도동사 앞에 추모비를 재건립함
⒞ 2007년 8월 국가보훈당국의 지원으로 거북상 보수 한글 해석판제작 및 주변 정리등을 하다
1987년(정묘)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과 함께 고종황제의 칙명장이 상설전시됨
二. 강학
일제 식민지 정책이 날로 강화되자 선생은 즐기시던 주초를 끊고 구국 제일의는 문맹퇴치라 여기시고 향리에서 40여년간 수천명의 후학을 양성하였음
三. 추모사업
① 사우 봉안 및 문집 발간 - 1962년(임인) 음10월 사론으로 면암 최익현 수남 고석진 두 선생과 함께 도동사에 추배 봉안하였으며 1963년(계묘) 음9월 문인들에 의해 송천 문집4권이 발간되었음
② 파리장서비 건립 - 1973년(계묘) 10월 3일 성균관 및 전국유림단 주최로 서울 장춘단공원에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정부 및 각계의 지원으로 건립함
③ 국가포장
⒜ 건국포장 - 1977년(정사) 12월 13일 정부는 선생의 구국정신을 숭앙하여 건국포장(제903호)을 추서함
⒝ 건국훈장 애국장 - 1990(경오) 12월 6일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 제123호를 제추서함
④ 묘비건립 - 1984년(갑자) 윤12월 일 보훈당국에 의해 묘비를 건립함
⑤ 추모비 건립
⒜ 1986년(병인) 5월 5일 문인 및 국내 각계 유지들의 후원으로 추모비 및 문인록비를 향리 입구에 건립함
건립위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경한 비문대자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학박사 김동리 비문소자 족손 고광준 추모비 제막식에 도지사 군수 익산보훈지청장 및 국내 문인 유지 등 이천여명이 참석하여 성대한 행사를 하였음
⒝ 2000년 5월 5일 신림면 가평리 도동사 앞에 추모비를 재건립함
⒞ 2007년 8월 국가보훈당국의 지원으로 거북상 보수 한글 해석판제작 및 주변 정리등을 하다
1987년(정묘)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과 함께 고종황제의 칙명장이 상설전시됨
松川 高先生 追慕碑(송천 고선생 추모비)
송천 고선생 추모비문
공의 휘는 예진이요 자는 계문이며 송천의 호이니 장흥인이시다. 려조 중서시랑 장흥백 휘 복림을 관조로 모시고 증손 삼계 휘 협은 려망에 영광으로 은둔하여 태종이 소조참의로 부르셨으나 불사하시고 아드님 휘 직은 세종때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였으나 불취하고 흥덕으로 이우하시니 공의 14대조이시다. 공은 고종 12년 을해 11월 24일 이곳 종송리에서 참봉 휘 시청의 4남으로 탄생하시니 품성이 청순하고 지기가 고결하였으며 처음 족형 수남 고석진 선생 문하에서 독학하여 문리가 대통하시고 뒤에 면암 최익현 선생에게 지알하며 도학파 예문을 강마하시니 도성덕립하여 엄연히 향서의 사표가 되시었다. 어버이 섬김에 지체를 겸양하고 거상에 곡묘 3년을 하고 부일에 재목하여 여재의 성을 다하셨으며 형을 공경하기를 엄부처럼 하여 출곡반면하고 유무를 함께 하였으며 미식이 있으면 혼자 드시는 일
공의 휘는 예진이요 자는 계문이며 송천의 호이니 장흥인이시다. 려조 중서시랑 장흥백 휘 복림을 관조로 모시고 증손 삼계 휘 협은 려망에 영광으로 은둔하여 태종이 소조참의로 부르셨으나 불사하시고 아드님 휘 직은 세종때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였으나 불취하고 흥덕으로 이우하시니 공의 14대조이시다. 공은 고종 12년 을해 11월 24일 이곳 종송리에서 참봉 휘 시청의 4남으로 탄생하시니 품성이 청순하고 지기가 고결하였으며 처음 족형 수남 고석진 선생 문하에서 독학하여 문리가 대통하시고 뒤에 면암 최익현 선생에게 지알하며 도학파 예문을 강마하시니 도성덕립하여 엄연히 향서의 사표가 되시었다. 어버이 섬김에 지체를 겸양하고 거상에 곡묘 3년을 하고 부일에 재목하여 여재의 성을 다하셨으며 형을 공경하기를 엄부처럼 하여 출곡반면하고 유무를 함께 하였으며 미식이 있으면 혼자 드시는 일
이 없었다. 평거에 아관대대로 염슬위자하여 고고한 기상을 흐트리지 않으시고 임사에 정사를 판별하여 의리소재에는 위난도 불사하셨다. 때에 국운이 비색하여 광무 9년 왜적의 강압으로 을사5조약이 체결되니 면암 선생을 비롯 한왜의거가 각지에서 일었는데 공은 면암 선생 휘하의 독립의군부에서 토왜격문을 사재로 인쇄하여 8도에 전포하고 백형 순진의 자금으로 화기를 구입하여 헌납했으며 의군의 정훈을 담당하여 정읍 순창 곡성 등지에서 활약하시다가 적에 피체되시어 전주감옥에서 수삭의 옥고를 치르셨다. 옥중에서 면암 선생 순국의 비보를 접하시고 방성통곡 음식을 전폐하여 기진함에 이르시니 그들도 경복하여 방환햇다. 광무 18년 월 고종황제로부터 종3품 통훈대부의 밀칙을 받으시고 구국일념으로 불태우시던 중 고종황제 인산때 대한문 앞에서 전국유림과 함께 예와 의와 신에 위배된 3대사를 사황께 진소하시고 이어 을사조약과 경술합방이 적신의 협박으로 체결되었음을 재소하셨으며 불국 파리에서 개회중인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자생독립을 탄원하는 장서를 전국유림 137인 연서로 밀송하니 이를 역사에서 파리장서사건이라 하고 그를 기념하는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가 서울 장충단공원에 건립되어 있다. 남촌 곽경열을 통하여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밝혀져 왜경의 감시가 일거수일투족에 미치자 구국의 첩경이 민을 깨우치고 인재 양성함에 있음을 간파하시고 즐기던 주초를 끊으시고 후생계도에 진력하시다가 감격의 을유 해방 후 임진 10월 12일 향년 77세로 하세하시니 문인 여마자 수십명의 장송으로 송암리 산직동 선영하에 안장되셨다. 부거 후 11년 사론이 제발하여 면암 수남 양선생과 함께 도동사에 봉안되시고 송천문집 4권이 인간되었으며 정부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배 밀양박씨는 규정공후인 준돈의 따님으로 사덕이 겸비하시고 공의 향학과 거의에 내조가 크시어 세인의 칭송을 받으신 분이시다. 4290년 정유 12월 2일 83수로 졸하시니 묘는 합펌하다. 2남 3녀를 두시니 장남 제선은 윤상 덕상 등 2남 3녀를 두었고 차남 제도는 석상 1남을 두다. 녀는 고흥류 종윤 전주최 동렬 연일정 운복에게 출가하였다. 오호라 공
은 거가에 효우하여 일향이 긍식하고 국난에 거의하여 국가가 포상하고 학덕이 고매하여 사림이 존사하니 그 학문 그 지절 후학의 우러르는 바다. 이에 유림 문인 후손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우면서 나에게 그 갈문을 청하므로 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전력이 있어서라 주손 윤상의 효심에 감심되고 한국종교협의회 성균관 대표이사 김석원의 청이 있어 흔연히 붓을 들어 위에 공의 사행을 약술하고 삼가 명을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현 운곡서원장 조경한 근찬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학박사 김시종 (동리) 근제
단기 4319년 4월 일 근수 족손 고광준 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현 운곡서원장 조경한 근찬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문학박사 김시종 (동리) 근제
단기 4319년 4월 일 근수 족손 고광준 근서
松川 高先生 文人錄碑(송천 고선생 문인록비)
전북 고창군 흥덕면 송암리 356-3 애국지사 만취 고순진 선생 추모비, 송천 고예진 선생 추모비를 찾았다.
애국지사 고순진 고예진 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고순진 고예진 두 선생은 부친 가선대부 고시청 선생의 장남과 4남으로 흥덕면 송암리 379번지에서 탄생하다. 두 선생의 숭고한 도학과 위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국내 문인들과 유지들의 발의로 1986년 5월 5일 도지사, 군수, 보훈지청장과 문인 유지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7척 두 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ㅇ 고순진(高舜鎭 1863-1938) 자는 의경(義卿) 호는 만취(晩翠)며 면암 선생의 문인이다. 1906년 면암 의거시 항일투쟁을 호소하고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다. 1914년 무기와 군량미 및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의군부에 헌납하다.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73년 10월 3일 성균관 및 전국 유림단 주최로 서울 장충단공원에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정부 및 각계의 지원으로 건립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제 567호)이 추서되다.
ㅇ 고예진(高禮鎭 1875-1952) 자는 계문(季文) 호는 송천(松川)이니 면암 수남 두선생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족형 고석진 족질 고제만과 3인이 면암 최선생을 방문 호남의거를 헌책하고 1906년 윤4월 면암 선생이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킴에 고석진 김양수 등과 함께 의병 궐기의 토왜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전파하고 순창 전투에서 의병대장 면암 등 12의사가 왜군에 붙잡혀 송천 선생은 전주 감옥에서 수개월의 옥고를 치르다 1914년 광무황제로부터 독립의군무 참모관의 칙명을 받고 전국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의사 곽경열을 통하여 중국 상해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헌납하다.
33인 뒤이은 12지사 1919년 3월 5일 고예진 고석진 선생을 비롯 12명이 선언장서에 연서하여 총독 장고천과 직접 담판하고 종로네거리에서 총독에게 보낸 장서 낭독과 만세를 고창하였고 1919년 프랑스 파리에 만국평화 회의가 개최됨에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전국 유림대표 곽종석 등 137 인연서로 대한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심산 김창숙을 밀사로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임정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 파리 세계평화회의에 제출케하다.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과 함께 고종황제의 칙명장이 상설 전시되다. 건국훈장 애국장(12호)이 추서되고 저서에 송천집 4권이 있다.
애국지사 고순진 고예진 두 선생은 부친 가선대부 고시청 선생의 장남과 4남으로 흥덕면 송암리 379번지에서 탄생하다. 두 선생의 숭고한 도학과 위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국내 문인들과 유지들의 발의로 1986년 5월 5일 도지사, 군수, 보훈지청장과 문인 유지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7척 두 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ㅇ 고순진(高舜鎭 1863-1938) 자는 의경(義卿) 호는 만취(晩翠)며 면암 선생의 문인이다. 1906년 면암 의거시 항일투쟁을 호소하고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다. 1914년 무기와 군량미 및 거액의 군자금을 독립의군부에 헌납하다.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73년 10월 3일 성균관 및 전국 유림단 주최로 서울 장충단공원에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정부 및 각계의 지원으로 건립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제 567호)이 추서되다.
ㅇ 고예진(高禮鎭 1875-1952) 자는 계문(季文) 호는 송천(松川)이니 면암 수남 두선생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족형 고석진 족질 고제만과 3인이 면암 최선생을 방문 호남의거를 헌책하고 1906년 윤4월 면암 선생이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킴에 고석진 김양수 등과 함께 의병 궐기의 토왜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전파하고 순창 전투에서 의병대장 면암 등 12의사가 왜군에 붙잡혀 송천 선생은 전주 감옥에서 수개월의 옥고를 치르다 1914년 광무황제로부터 독립의군무 참모관의 칙명을 받고 전국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의사 곽경열을 통하여 중국 상해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헌납하다.
33인 뒤이은 12지사 1919년 3월 5일 고예진 고석진 선생을 비롯 12명이 선언장서에 연서하여 총독 장고천과 직접 담판하고 종로네거리에서 총독에게 보낸 장서 낭독과 만세를 고창하였고 1919년 프랑스 파리에 만국평화 회의가 개최됨에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전국 유림대표 곽종석 등 137 인연서로 대한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심산 김창숙을 밀사로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임정 김규식으로 하여금 프랑스 파리 세계평화회의에 제출케하다.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과 함께 고종황제의 칙명장이 상설 전시되다. 건국훈장 애국장(12호)이 추서되고 저서에 송천집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