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삼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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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주진리 산16
탐방로그
김공삼 의병장은 1907.8 의병장 기삼연의 휘하 중군장으로 활동하다 1908년 기삼연 대장이 피체된 후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변산에서 일군기병과 교전하는등 의병활동 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1910.1.27 순국하셨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갑자기 서로 더불어 슬피 울며 말하기를 "오늘 일이 군민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술을 마련하여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며 듣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일이 있으면 모이고 일이 없으면 흩어져 있다가 기일을 정하여 고을에 흩어진 무기를 거두어 군인에게 주어 광산(光山)을 공격할 때 쓸 계획이었으나 김영업이 유종여(柳宗汝)에게 살해되었다. 아마도 유종여는 의뢰할 곳이 없는 병졸들을 거두어 재품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여 잔혹하기가 비할 데가 없으니, 김 장군이 여러 차레 의(義)로서 타일렀다. 그러나 유종여가 장군을 미워하여 고립된 군사가 백암사에 들어간 것을 틈타 뒤를 밟아 김 장군을 살해했을 것이다. 김공삼이 여러 사람들에게 맹서하기를 "김 장군은 의를 지킨 것이 명백하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아는 바인데 예측할 수 없는 화를 만났으니, 이에 군이 반드시 보복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사를 거느리고 손룡산(巽龍山)에 들어가서 글을 보내 회의하고 도착하니 그들을 포박하여 먼저 포를 쏜 자와 칼을 시험한 자 두 명을 베고, 나머지는 장차 그 죄를 따져서 의병 진지에 돌려 알리고 죽였다. 같은 진지에 개인적인 일이 있는 사람은 밤에 포박을 풀어 놓아주었다. 군인들은 장성(長城)으로 돌아와 사졸을 훈련시키며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 동굴을 견고하게 하고 나와서 왜적에 대응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 동굴을 견고하게 하고 나와서 왜적에 대응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덕관(趙德寬)과 김준(金準)이 서로 이어서 어등산(魚登山)에서 순국하니 여러 진영이 혹은 흩어지고 혹은 달아나 숨기도 하였다. 우리의 형세는 더욱 고약(孤弱)하였으나 왜적의 세력은 날로 치열해져 머물러 있는 병참(兵站)이 별같이 벌여 있고 바둑돌처럼 위치하여 살고있는 백성들을 발고(發告)하고 산야를 전부 수색하니 계책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박도경과 함께 앞뒤로 잡혀 수도 없이 죄를 캐물었으나, 의기는 더욱 열렬하고 욕설은 더욱 강경해지니 왜적들도 의롭게 여기고 술과 안주를 주며 위로하였는데 물리치며 받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의 살을 씹고 너희들의 가죽을 깔고 자려고 하였으나 일이 이루어진 것이 없는데 도리어 너희 술과 안주를 먹고 마시면서 하루의 삶을 도모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광주로 압송되고 광주에서 대구로 이송되었다. 왜적이 머리를 숙여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회유하니 큰 소리로 욕하며 말하기를 "나라의 신민으로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망하려는 것을 보고 의병을 모아 복수를 도모함이 본디 하늘의 법도요 땅의 도리이니 어찌 나의 당당한 의를 굽혀 견양(犬羊)의 무리에게 애걸하겠는가? 한 번 죽으면 그뿐이니 속히 나를 죽여라. 나는 마땅히 여귀가 되어 왜적을 섬멸하리라."라고 하니 적들도 서로 더불어 혀를 내둘리며 의사(義士)라고 말하고 마침내 살해하여 성 밖에 이엉으로 덮어 놓았다. 모양(牟陽 고창) 인사들이 돈을 갹출하여 고향 산에 옮겨 장레를 치렀다.
행우 기우만(寄宇萬)은 짓는다. 무안 박연재(朴年在)는 쓴다.
의병장 김공 순충비(義兵將金公殉忠碑)
공의 휘는 봉규(奉奎)요, 공삼(公三)이니 김해인(金海人)이다. 본군 고수면 은사리(隱士里) 출생으로 편모슬하에 어렵고 힘들게 자랐으나, 남보다 이해가 빠르고 영리하여 학식이 있었으며 외모는 큰 키에 멋있는 수염으로 타고난 자품(姿品)이 걸출했고 지기(志氣)가 강개하였다. 을미년에 왜적이 우리 황후를 시해하고 정미년에 황제를 협박하여 양위(讓位)토록 하니, 공이 분연(奮然)히 궐기하여 "신민(臣民)된 자가 어찌 국가의 위태로움을 좌시할 수 있으랴?" 성재(省齋) 기삼연(寄三衍)과 창의 회맹을 결성하고 복수에 선봉이 되어 정미년(1907) 9월 25일 문수산(文殊山) 전투를 시작으로 26일에 무장읍(茂長邑) 전투, 27일 고창읍(高敞邑) 전투에서 김익중(金翼中)이 전사했다. 12월 1일에 수연산(隨緣山)에서 출전제를 지냈고 3일에 성송 내원(內院) 전투, 13일 흥덕 안치(鞍峙) 전투에서 김기봉(金起鳳)이 전사했고, 28일 성재의 화를 당한 일로 김공 용구(容球)를 도통(都統)으로 추대하였고, 무신년(1908) 3월 12일에 구수산(九峀山) 전투, 4월 19일에 김용구 도통이 화를 당해 문수산 장령회에서 공을 도통으로 추대하니, 숙연(肅然)히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성재의 추모제를 올린 후 복수를 다짐했다. 다음 날 군유(群儒) 전투의 급보(急報)를 받고 원군으로 출병하여 떨쳐 싸웠으나 적군의 훈련된 군사와 화력에 대패를 당하고 고산(高山)으로 퇴각하였다. 그 후로도 항전을 지속하려했으나 적의 세력은 날로 더욱 치열하고 원군이 없어 포장(砲將) 박경래(朴慶來)와 앞뒤로 적에게 납치되어 온갖 고문에도 의연(毅然)히 굽히지 아니하니, 적이 술과 안주로 회유했으나 물리치고 욕하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놈들의 살을 씹고 가죽을 깔고 자려했으나 이지경이 되어 어찌 네놈들 술과 안주로 하루 연명(延命)을 도모하랴?"라고 하니 놈들이 할 수 없이 광주로 압송했다가 다시 대구로 감옥을 옮긴 뒤로 머리를 숙이도록 타이르니, 큰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신민으로 머리 숙여 목숨을 구걸하랴? 빨리 죽여라. 내 마땅히 여귀(厲鬼)가 되어 네놈들을 섬멸하리라."라고 하였다. 의기가 더욱 열렬하니 적들도 혀를 내밀며 감탄하고 참 의사라고 하였다. 마침내 교수형에 순절(殉節)하니 유림들이 그 충절을 흠모하여 고향으로 옮겨 장레를 치렀다. 공께서 외아들이 있었으나 손자 없이 사망함에 김옥식(金玉植)이 계속 지키고 보호하다가 진채석(陳彩錫)의 헌성(獻誠)으로 이 자리에 이장하고 군의 비용으로 석의(石儀)와 묘표를 갖추니, 오호라! 공의 당당한 그 충절은 해.달과 빛을 다투어 먼 훗날까지 빛나리라. 함평(咸平) 이돈우(李敦禹)는 짓는다.
전북 고창군 아산면 주진리 산16 의병장 김공삼선생 묘소를 찾아왔다.
의병장 김공삼의 묘(1866-1910)
의병장 김공삼은 1866년 고창에서 출생하여 1907년 9월 기삼연의 휘하의 중군장으로 고창 무장 부안 담양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1907년 1월 기삼연이 피체된후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200여명의 부하를 지휘하면서 동년 2월에는 장성군 송치산에서 일군 4명을 저격 3월에는 장성 월반장터에서 일인 수산 3명 한인순사 3명 살해, 5월에는 무장에서 일군 기마병과 접전하였고 1909년 2월 변산에서 일군과 교전하는 등 독립 의병 활동에 많은 전과를 올리다가 9월 20일 피체되어 1910년 순국하셨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1994년 9월에 고수면 은사리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었음
의병장 김공삼의 묘
한말의병장 김공 기적비(韓末義兵將金公紀績碑)
김봉규(金奉奎)의 자는 공삼(公三)이니 김해인(金海人)이다. 큰 키에 수염이 있고 가협산(加峽山) 속 궁벽한 곳에 살아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적었으나 강개하여 기개와 절조가 있었다. 기성재(寄省齋)가 복수할 의지가 있는 것을 알고 서로 따르며 비밀회의를 하고 뜻있는 인사를 불러 모아 때를 기다려 쓰임에 응하려고 하였다. 기 대장이 일을 시작하자 군대 편제와 무기를 주선한 일이 많아 기 대장이 평소 쓸만한 인재로 허여하고 군무를 위임하니, 사양하며 말하기를 "저의 지위가 미약하니 높지도 않고 믿음도 없어서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계획을 돕는 여러 일이 진실로 저의 힘이 미치는 것이라면 비록 죽음이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왜적의 형세를 정탐하고 병민(兵民)을 권장하여 흥기시키며, 병기를 거두어 모으고 군량미를 계속 공급하여 온 마음으로 힘을 다해 기 대장에게 좌우 손처럼 하였다. 기 대장이 적에게 체포되자 병졸들이 흩어져 도망치니 이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일을 맡지 않으면 큰일이 성사되지 않으니 국가의 게책은 어찌하며, 기 대장의 원수는 어찌하오?"라고 하였다. 무리가 추대하여 장군으로 정하여 한결같이 소하(蘇何)의 규약을 따라 크게 모여 사졸들이 맹세하니, 타일러 훈계하기를 "지금 여러 의병 중에 누가 기 대장과 죽음을 함께하기로 맹약하지 않았겠는가마는 기 대장이 체포되어 매우 곤혹스러우니 복수할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어찌 같은 뜻에 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마침내 모두 함께 자리를 만들어 통곡하고 상복을 입고 행군하였다. 박도경(朴道京)을 위임하여 포사장(砲士將)으로 삼고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서로 더불어 도모하기를 "모든 일은 합하면 강해지고 나뉘면 약해집니다. 지금 봉기한 의사들을 보니 모두 사졸은 천 명이 넘지 않고 대포는 백 문이 되지 않습니다. 마땅히 일제히 통고하여 한 곳에서 회맹하여 마음과 힘을 합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게 되면 성공하고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곧바로 각 진지에 격문(檄文)을 보내 함께 모일 날을 정했으나 모든 진지가 의리를 명분으로 사사로움을 얻는 자들은 한 명도 오지 않고 홀로 김영엽(金永曄)이 먼저 도착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일찍이 가협산에 모이려는 심산이었다."라고 하였다. 소를 잡고 안주를 마련하여 음악을 연주하고 기쁘게 놀며 절반 정도 먹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