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만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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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산51
탐방로그
선생의 묘는 通訓大夫 竹溪 長興 髙公 之墓(통훈대부 죽계 장흥 고공 지묘)라는 묘비와 함께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통훈대부 죽계 고공 묘갈명 병서
옛날 섬 오랑캐가 창궐할 적에 면암선생이 남하하여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고수남(고석진)옹이 지휘봉을 잡고 전술을 폈는데, 수옹을 전군(후군)으로 하고 좌우군이 힘을 모아 그 첫머리에 간 사람이 바로 통훈대부 죽계 장흥 고공 휘 제만, 자 치범이다. 고씨는 장흥백 휘 복림을 시조로 삼고 벼슬이 계속 이어져 대대로 이름난 명문거족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 휘 신부라는 분은 태종의 구계(친분이 잇는 사이)로 호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여러 대를 지나서 휘 덕붕, 호 여곡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도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승지를 추증 받앗다. 이분이 낳은 후 수겸은 병자호란 때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수원에 이르러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이분이 낳은 휘 여흥, 호 요은은 윤미촌(윤선거)의 고제로 학행이 깊고 돈독했으며, 명재 윤문성공[윤증]이 묘비명을 짓고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낸다. 이 분이 낳은 휘 재혁, 호 왕서는 명재문하에서 학업을 받고 문학이 드러났다. 이분이 낳은 휘 우열, 호 옥호는 학문이 박식하고 행실이 돈독하니 공에게 6세조이다. 고조는 극해이고, 증조는 봉환이며, 조부는
통훈대부 죽계 고공 묘갈명 병서
옛날 섬 오랑캐가 창궐할 적에 면암선생이 남하하여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고수남(고석진)옹이 지휘봉을 잡고 전술을 폈는데, 수옹을 전군(후군)으로 하고 좌우군이 힘을 모아 그 첫머리에 간 사람이 바로 통훈대부 죽계 장흥 고공 휘 제만, 자 치범이다. 고씨는 장흥백 휘 복림을 시조로 삼고 벼슬이 계속 이어져 대대로 이름난 명문거족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 휘 신부라는 분은 태종의 구계(친분이 잇는 사이)로 호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여러 대를 지나서 휘 덕붕, 호 여곡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도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승지를 추증 받앗다. 이분이 낳은 후 수겸은 병자호란 때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수원에 이르러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이분이 낳은 휘 여흥, 호 요은은 윤미촌(윤선거)의 고제로 학행이 깊고 돈독했으며, 명재 윤문성공[윤증]이 묘비명을 짓고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낸다. 이 분이 낳은 휘 재혁, 호 왕서는 명재문하에서 학업을 받고 문학이 드러났다. 이분이 낳은 휘 우열, 호 옥호는 학문이 박식하고 행실이 돈독하니 공에게 6세조이다. 고조는 극해이고, 증조는 봉환이며, 조부는
시익이고, 아버지는 성진이니, 모두 선비의 행실이 있었다. 어머니 나주 임씨는 귀래정 임붕의 후손인 몽상의 딸이니, 일찍 과부가 되어 절개를 지켜 효열로 여러 차례 섬천에 올랐다. 철종 경신년 8월 2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단아하고 타고난 바탕이 강직하고 과단성 있으며 밝고 민첩하며 기개와 도량이 고매하여 여러 아이와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승에 나아가 배울 때 재주와 생각이 뛰어나고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의로움을 들으면 힘써 실행하고 눈만 스치면 암송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경사를 바탕으로 공부하였지만 더욱 논어와 맹자에 주력하여 뜻을 파악하였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섬겼는데, 지체를 모두 극진하게 봉양하였고, 계부 죽게공 정진을 아버지처럼 섬겨 성의와 공경을 극진히 했다. 죽파공은 공의 학문을 위해 집안일에 힘을 다햇다. 약관의 나이가 되자 족숙 수남옹 문하를 따랐다. 수남옹은 과거 공부를 시험하고 마음으로 향하는 공부를 하도록 격려하며 "이 아이는 하늘이 우리 집안에 내려준 천리구"라고 말하였다. 계묘년에 면암선생을 예로 찾아뵈니 선생께서도 이미 기이함을 알아보고 원대함으로 기약하며 손수 잠명을 써주면서 격려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을 할 때엔 반드시 목적을 세워야 하니, 행단의 삼천 제자 중에 안연의 학문만이 정진하여 그치지 않아서 성인의 영역에 오를 수 있었다. 전해받고 도 익혀서 아침저녁으로 더욱 힘써 이것을 한결같이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거의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몸을 닦고 마음을 잡아 보존하는 공부가 더욱더 견고하고 치밀하여 일상생활의 윤리에 발현되어 가정에서 효제가 행해지고 남에게 인애가 미쳤으며, 말하고 침묵할 때 일정함이 있고 기쁘고 슬플 때 드러나는 모습이 없이하여 안연을 바라는 노력으로 법도를 삼았다. 정유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망극한 슬픔으로 몸이 야위고 미음만 먹어 얼굴이 까맣게 되고 매일 무덤 살피기를 삼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면암선생의 유적을 편찬하였다. 선영에 제전을 두고 의물을 준비하는 일에 힘썼다. 융희 7년 독립의군부의 공로로 통훈대부에 올랐다. 파리장서사건으로 신사년에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고 군산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도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나, 형독으로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다. 임오년 10월 8일 부안 산내 방연동 뒤에 장사를 지낸 이후 경자년 성내면 죽립 뒤 기슭 유좌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이 몰한지 24년 뒤 을사년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훈장 포상과 임자년에 파리장서 137명의 연명비가 장충공원에 건립되엇다. 유고 한 구너이 세상에 간행되엇다. 두 분의 부인을 두었으니, 숙인 울산 김씨 문정공 인후의 후손 요인의 딸로 부덕이 잘 갖추어지고 효열로 여러 차례 도재에 올랐으며 삼강록에 등재되었다. 자식 없이 정축년 4월 23일에 일찍 졸하니 묘는 공의 왼편에 합장하였다. 숙인 함평 이씨는 죽곡 장영의 후손 충모의 딸로 부덕은 군자와 짝 할 만하고 내조가 있었으며 효도로 섬천에 올랐다. 임술년에 태어나서 정유년 8월 10일에 졸하였다. 죽립 뒤 기슭 갑자의 언덕에 묘를 썼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면상은 선조의 덕을 잘 이어 빛냈고, 다음으로 순상, 만상이다. 딸은 남원 윤태효와 전주 이원중에게 시집갔다. 면상의 아들은 광원, 광선, 작은아버지 뒤로출계한 광삼이고 딸은 전주 최정홍에게 시집갔다. 순상은 자식이 없어 조카 광선을 취하여 후사를 세웠다. 만상의 아들은 광필, 광도, 광진이고 딸은 밀양 박덕우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병규, 창규, 학규, 흥규, 영규, 연규, 명규, 형규, 예규, 영규, 현규, 인규, 진규, 천규, 백규이다. 현손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우둑하게 남다른 자질로 성현의 학문이 있어 경, 사, 자, 집에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고 깊이 생각하고 반복하며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써 실천하며, 이와 기의 변별과 맑음과 사특의 구별을 밝혀 선비들의 기대가 성대하였다. 섬 오랑캐에게
시익이고, 아버지는 성진이니, 모두 선비의 행실이 있었다. 어머니 나주 임씨는 귀래정 임붕의 후손인 몽상의 딸이니, 일찍 과부가 되어 절개를 지켜 효열로 여러 차례 섬천에 올랐다. 철종 경신년 8월 2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단아하고 타고난 바탕이 강직하고 과단성 있으며 밝고 민첩하며 기개와 도량이 고매하여 여러 아이와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승에 나아가 배울 때 재주와 생각이 뛰어나고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의로움을 들으면 힘써 실행하고 눈만 스치면 암송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경사를 바탕으로 공부하였지만 더욱 논어와 맹자에 주력하여 뜻을 파악하였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섬겼는데, 지체를 모두 극진하게 봉양하였고, 계부 죽게공 정진을 아버지처럼 섬겨 성의와 공경을 극진히 했다. 죽파공은 공의 학문을 위해 집안일에 힘을 다햇다. 약관의 나이가 되자 족숙 수남옹 문하를 따랐다. 수남옹은 과거 공부를 시험하고 마음으로 향하는 공부를 하도록 격려하며 "이 아이는 하늘이 우리 집안에 내려준 천리구"라고 말하였다. 계묘년에 면암선생을 예로 찾아뵈니 선생께서도 이미 기이함을 알아보고 원대함으로 기약하며 손수 잠명을 써주면서 격려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을 할 때엔 반드시 목적을 세워야 하니, 행단의 삼천 제자 중에 안연의 학문만이 정진하여 그치지 않아서 성인의 영역에 오를 수 있었다. 전해받고 도 익혀서 아침저녁으로 더욱 힘써 이것을 한결같이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거의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몸을 닦고 마음을 잡아 보존하는 공부가 더욱더 견고하고 치밀하여 일상생활의 윤리에 발현되어 가정에서 효제가 행해지고 남에게 인애가 미쳤으며, 말하고 침묵할 때 일정함이 있고 기쁘고 슬플 때 드러나는 모습이 없이하여 안연을 바라는 노력으로 법도를 삼았다. 정유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망극한 슬픔으로 몸이 야위고 미음만 먹어 얼굴이 까맣게 되고 매일 무덤 살피기를 삼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면암선생의 유적을 편찬하였다. 선영에 제전을 두고 의물을 준비하는 일에 힘썼다. 융희 7년 독립의군부의 공로로 통훈대부에 올랐다. 파리장서사건으로 신사년에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고 군산형무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도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나, 형독으로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다. 임오년 10월 8일 부안 산내 방연동 뒤에 장사를 지낸 이후 경자년 성내면 죽립 뒤 기슭 유좌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이 몰한지 24년 뒤 을사년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훈장 포상과 임자년에 파리장서 137명의 연명비가 장충공원에 건립되엇다. 유고 한 구너이 세상에 간행되엇다. 두 분의 부인을 두었으니, 숙인 울산 김씨 문정공 인후의 후손 요인의 딸로 부덕이 잘 갖추어지고 효열로 여러 차례 도재에 올랐으며 삼강록에 등재되었다. 자식 없이 정축년 4월 23일에 일찍 졸하니 묘는 공의 왼편에 합장하였다. 숙인 함평 이씨는 죽곡 장영의 후손 충모의 딸로 부덕은 군자와 짝 할 만하고 내조가 있었으며 효도로 섬천에 올랐다. 임술년에 태어나서 정유년 8월 10일에 졸하였다. 죽립 뒤 기슭 갑자의 언덕에 묘를 썼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면상은 선조의 덕을 잘 이어 빛냈고, 다음으로 순상, 만상이다. 딸은 남원 윤태효와 전주 이원중에게 시집갔다. 면상의 아들은 광원, 광선, 작은아버지 뒤로출계한 광삼이고 딸은 전주 최정홍에게 시집갔다. 순상은 자식이 없어 조카 광선을 취하여 후사를 세웠다. 만상의 아들은 광필, 광도, 광진이고 딸은 밀양 박덕우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병규, 창규, 학규, 흥규, 영규, 연규, 명규, 형규, 예규, 영규, 현규, 인규, 진규, 천규, 백규이다. 현손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우둑하게 남다른 자질로 성현의 학문이 있어 경, 사, 자, 집에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고 깊이 생각하고 반복하며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써 실천하며, 이와 기의 변별과 맑음과 사특의 구별을 밝혀 선비들의 기대가 성대하였다. 섬 오랑캐에게
유린을 당하자 토복을 기약하였으나 몸에 혹독한 고초를 당하고 끝내 순국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웅대한 의사가 아니겠는가? 어느 날 그의 손자 광삼, 광진씨가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니, 나는 '공의 은덕과 의연한 절개는 마땅히 뛰어난 문장가를 얻어 밝혀야 할 일인데, 나 같이 못난 사람이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어려서부터 여러 번 공을 뵙고 마음속 깊이 흠모하고 감복하여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잇는다.
면암선생 문하엔 참으로 어진 선비가 많으니 연원이 있고 근원이 있어 매우 길게 흐르네. 독실한 공부 밤낮으로 스스로 힘쓰고 종사가 이미 무너지니 왜적 토벌에 힘을 다하네. 현자를 높이고 도를 지키는 일 마음에서 나오니 진실하도다! 우리 공 빛나도다! 그 절개여. 말세에 모범이 될만하니 누가 흠복하지 않으리. 빗돌이 새긴 나의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으리라.
단기 4312년 기미 6월 상순 의령 남대희는 삼가 짓는다. 종질 영상은 삼가 쓴다.
유린을 당하자 토복을 기약하였으나 몸에 혹독한 고초를 당하고 끝내 순국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웅대한 의사가 아니겠는가? 어느 날 그의 손자 광삼, 광진씨가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니, 나는 '공의 은덕과 의연한 절개는 마땅히 뛰어난 문장가를 얻어 밝혀야 할 일인데, 나 같이 못난 사람이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어려서부터 여러 번 공을 뵙고 마음속 깊이 흠모하고 감복하여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잇는다.
면암선생 문하엔 참으로 어진 선비가 많으니 연원이 있고 근원이 있어 매우 길게 흐르네. 독실한 공부 밤낮으로 스스로 힘쓰고 종사가 이미 무너지니 왜적 토벌에 힘을 다하네. 현자를 높이고 도를 지키는 일 마음에서 나오니 진실하도다! 우리 공 빛나도다! 그 절개여. 말세에 모범이 될만하니 누가 흠복하지 않으리. 빗돌이 새긴 나의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으리라.
단기 4312년 기미 6월 상순 의령 남대희는 삼가 짓는다. 종질 영상은 삼가 쓴다.
竹湖居士 長興 髙公 成鎭 之墓(죽호거사 장흥 고공 성진 지묘)
玉泉 長興 髙公 晩相 之墓(옥천 장흥 고공 만상 지묘)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산 51 통훈대부 죽계장흥고공지묘 - 고제만(고치범)
合同儀禮床(합동의례상)
通訓大夫 竹溪 長興 髙公 之墓(통훈대부 죽계 장흥 고공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