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남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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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 388-16
탐방로그
2018년에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 입구에 있다는 유한의사 고제남 선생 추모비를 찾았었지만 찾지를 못했었다.
이번에 고창군의 책자에서 정확한 주소를 알게 되었다.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 388-16이다.
해당 추모비는 고제남 지사를 기리기 위해 1963년 고창군이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유한의사 장흥고공 제남 추모비
의사 장흥 고공의 휘는 제남이고, 자는 복경이며, 호는 인산이시다. 임진년에 창의한 여곡 선생 덕붕의 10세손이며, 요은 선생 여흥의 8세손이며, 휘 영진의 아드님으로 광무 정해년(1887) 3월 1일 지금의 성내면 옥제리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기품을 타고나서 족숙 수남 선생에게 수학하실 때 이해 명민하셨고,동료들과 놀이를 할 때는 언제나 대장이 되어 군사놀이를 하심에 무사의 기상이 엿보였다. 이렇듯 지용이 모두 갖추어져 오전하더니, 나라의 운명이 불행하여 왜구의 침략이 날로 커갈 즈음, 치욕의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격분하여 창의할 결심을 품으시니 공의 나이 19세이었다. 다음해인 병오년(1906)에 면암 선생께서 남하하여 의병을 일으킬 때 의거하려고 하였으나 생각하지도 못한 모친의 별세로
유한의사 장흥고공 제남 추모비
의사 장흥 고공의 휘는 제남이고, 자는 복경이며, 호는 인산이시다. 임진년에 창의한 여곡 선생 덕붕의 10세손이며, 요은 선생 여흥의 8세손이며, 휘 영진의 아드님으로 광무 정해년(1887) 3월 1일 지금의 성내면 옥제리에서 출생하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기품을 타고나서 족숙 수남 선생에게 수학하실 때 이해 명민하셨고,동료들과 놀이를 할 때는 언제나 대장이 되어 군사놀이를 하심에 무사의 기상이 엿보였다. 이렇듯 지용이 모두 갖추어져 오전하더니, 나라의 운명이 불행하여 왜구의 침략이 날로 커갈 즈음, 치욕의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격분하여 창의할 결심을 품으시니 공의 나이 19세이었다. 다음해인 병오년(1906)에 면암 선생께서 남하하여 의병을 일으킬 때 의거하려고 하였으나 생각하지도 못한 모친의 별세로
인하여 한을 품은 체 뜻을 못 이루었고, 정미년(1907) 12월 5일 동지 2백여 명을 모집하여 공의 통솔하에 남도로 행군하여 창의문을 포고하였다. 곧바로 정읍 입암산성에 이르러 일본 헌병과 교전하여 대파하고, 다음해인 무신년(1908) 3월 흥덕 용병암 작전과 동년 5월 소노령 전투에서 적군을 다수 총살하였고, 같은 해 11월 7일 후포 일본 헌병 병참소를 불로 공격하여 총검탄환 등을 다수 노획하였다. 이와 같이 군의 형세가 당당할 즈음 기유년(1909) 6월 23일 동지 7인 등과 소성면 두암마을에서 잠복작전을 모의하던 중 애석하게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7인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라 하여 당일 석방되고, 공은 전남 장성 일본 헌병 분견소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굽히지 않고 힘주어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남아의 정의는 충효라, 예의 동방 우리 강토를 무참히 짓밟는 섬 오랑캐 네놈들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손발을 묶이니 불충불효함이 이에서 비할 바가 없다."라고 한탄한 소리에 원수의 총탄에 쓰러지시니 기유년 6월 30일, 23세의 고귀한 생명을 받치셨다. 장하구나, 의사여! 우뚝한 충절 설상 같이 늠름하다. 나라 잃은 우리민족 서러움이 어떻던가? 의사의 애국정신 누구나 경앙의 눈물 금치 못함은 물론 청소년들에게 주는 감명은 더욱 크도다. 해방 후 계사년(1953) 2월 전남 광산군 대촌면 원산리에 건립된 호남순국열사비에 기재되엇으나, 본군에서는 광복 19년을 맞이한 오늘에까지 의사의 혁혁한 사적을 포양(기리고 장려함)치 못했음이 매우 유감이다. 내가 고을에 부임한 뒤로 유림 여러분들의 호소장과 각층 인사들의 심의하에 추모비를 건립함에 즈음하여 전교 김기택 동지와 함께 사적을 간략히 기록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바이다. 배위 김해 김씨는 정절을 온전히 지키고, 아들 원상은 각별희 유풍을 지키며 손자 광천, 광운, 광룡, 광학, 광배, 광균 모두 힘써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책을 읽으니 의사의 끼친 음덕이 풍성하도다.
단기 4296년 6월 일 고창군수 신상우는 삼가 짓는다. 월성 김기택은 삼가 기술한다. 상락 김정회는 삼가 쓴다.
인하여 한을 품은 체 뜻을 못 이루었고, 정미년(1907) 12월 5일 동지 2백여 명을 모집하여 공의 통솔하에 남도로 행군하여 창의문을 포고하였다. 곧바로 정읍 입암산성에 이르러 일본 헌병과 교전하여 대파하고, 다음해인 무신년(1908) 3월 흥덕 용병암 작전과 동년 5월 소노령 전투에서 적군을 다수 총살하였고, 같은 해 11월 7일 후포 일본 헌병 병참소를 불로 공격하여 총검탄환 등을 다수 노획하였다. 이와 같이 군의 형세가 당당할 즈음 기유년(1909) 6월 23일 동지 7인 등과 소성면 두암마을에서 잠복작전을 모의하던 중 애석하게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7인은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라 하여 당일 석방되고, 공은 전남 장성 일본 헌병 분견소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굽히지 않고 힘주어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남아의 정의는 충효라, 예의 동방 우리 강토를 무참히 짓밟는 섬 오랑캐 네놈들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손발을 묶이니 불충불효함이 이에서 비할 바가 없다."라고 한탄한 소리에 원수의 총탄에 쓰러지시니 기유년 6월 30일, 23세의 고귀한 생명을 받치셨다. 장하구나, 의사여! 우뚝한 충절 설상 같이 늠름하다. 나라 잃은 우리민족 서러움이 어떻던가? 의사의 애국정신 누구나 경앙의 눈물 금치 못함은 물론 청소년들에게 주는 감명은 더욱 크도다. 해방 후 계사년(1953) 2월 전남 광산군 대촌면 원산리에 건립된 호남순국열사비에 기재되엇으나, 본군에서는 광복 19년을 맞이한 오늘에까지 의사의 혁혁한 사적을 포양(기리고 장려함)치 못했음이 매우 유감이다. 내가 고을에 부임한 뒤로 유림 여러분들의 호소장과 각층 인사들의 심의하에 추모비를 건립함에 즈음하여 전교 김기택 동지와 함께 사적을 간략히 기록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바이다. 배위 김해 김씨는 정절을 온전히 지키고, 아들 원상은 각별희 유풍을 지키며 손자 광천, 광운, 광룡, 광학, 광배, 광균 모두 힘써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책을 읽으니 의사의 끼친 음덕이 풍성하도다.
단기 4296년 6월 일 고창군수 신상우는 삼가 짓는다. 월성 김기택은 삼가 기술한다. 상락 김정회는 삼가 쓴다.
유한의사 고제남 선생 추모비를 찾기 위해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 388-16에 왔다.
有韓義士 仁山 高公 追慕碑(유한의사 인산 고공 추모비)
有韓義士 仁山 高公 追慕碑(유한의사 인산 고공 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