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양계리 458-7
- 탐방로그
- 전북 고창군 성내면 양계리 458-7 흥동장학당 앞. 흥동장학단 입구에는 흥동장학단기적비, 대한독립운동사적비 외에 3기의 비석이 앞에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흥동장학회 회원명단
흥동장학회 회원의 성명과 함께 관향 및 관계 및 현회원 이름으로 이어진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흥동장학회 회원의 성명과 함께 관향 및 관계 및 현회원 이름으로 이어진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흥동장학회 원계원의 성명과 함께 관향 및 관계 및 현회원 성명으로 이어진 명단을 비롯하여
흥동장학당 기적비건립 추진위원회의 회원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흥동장학당 기적비건립 추진위원회의 회원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전북 고창군 성내면 양계리 458-7 흥동장학당 앞
흥동장학당 입구에는 흥동장학당기적비, 대한독립운동사적비 외에 3기의 비석이 앞에 있었다.
그 뒤쪽에 있는 흥동장학당기적비와 대한독립운동사적비
大韓獨立運動事勣碑(대한독립운동사적비)
대한독립운동 책임부서 병 임원방명
전라북도 감독부
감독 노진룡 이석렬 이철환 백낙일, 통신원 박기동
부감독 오의균 나홍균 홍종화
재무원 이휴열 이종택 이우철 황종관 이강렬 이봉헌
고문 강대직 신용수 김양평
··· 하략 ···
전라북도 감독부
감독 노진룡 이석렬 이철환 백낙일, 통신원 박기동
부감독 오의균 나홍균 홍종화
재무원 이휴열 이종택 이우철 황종관 이강렬 이봉헌
고문 강대직 신용수 김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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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는 백성이 없어서는 안 되고 백성은 나라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지난 경술년(1910)에 옥사(屋社)의 변고를 만나 백성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되니 죽음을 맹서하고 식민정책에 불복(不服)하여 필생토록 조국회복을 위해 떨쳐 싸웠다. 긴 세월을 이어오다가 세월이 바뀌어 고종황제가 유폐(幽閉)된 채 갑자기 돌아가신 뒤에 신민(臣民) 된 자들의 오랫동안 쌓인 분통이 일촉즉발의 상황이엇으나 극단의 방법을 써서 조치하지 못하던 와중에 독립선언문이 경향(京鄕)에서 갑자기 선포되었으니, 바로 기미년(1919) 3월 1일 고종의 인산(因山) 당일이었다.
아, 애통하도다! 3천만 온 겨레 중에 어느 누가 이에 찬성하지 않았겠는가? 비장한 사태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우나 죽어서 군국(君國)에 보답한 사람과 살아서 광복을 도모한 사람이 일찍이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위에 기록한 제공(諸公)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안으로 경향동지들과 서로 통지하고 밖으로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나라 안팎으로 호응하며 민족사상고취와 독립정신앙양과 군자금조달과 한인(韓人) 관공서 관리들에게 사퇴를 경고하는 일 등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힘을 쏟았다. 전북의 모든 곳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주선한 사람을 망라해보면 그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가 아는 것일뿐만 아니라 그 실적(實蹟)이 상해에서 현저하게 드러나 일본이 관할하는 경찰서에서 핵심내용을 기록하였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이와 같은 장한 거사(擧事)를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사모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에 빗돌[비석]에 새겨 그 개요(槪要)를 대략 거론하여 감히 잊지 않겠다는 뜻을 대신할 따름이다.
광복 16년 뒤, 경자(1960) 3월 1일 대한독립운동사적비 건립추진위원장 고창군수 김관묵(金寬默)은 삼가 기록한다.
아, 애통하도다! 3천만 온 겨레 중에 어느 누가 이에 찬성하지 않았겠는가? 비장한 사태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우나 죽어서 군국(君國)에 보답한 사람과 살아서 광복을 도모한 사람이 일찍이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위에 기록한 제공(諸公)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안으로 경향동지들과 서로 통지하고 밖으로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나라 안팎으로 호응하며 민족사상고취와 독립정신앙양과 군자금조달과 한인(韓人) 관공서 관리들에게 사퇴를 경고하는 일 등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힘을 쏟았다. 전북의 모든 곳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주선한 사람을 망라해보면 그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가 아는 것일뿐만 아니라 그 실적(實蹟)이 상해에서 현저하게 드러나 일본이 관할하는 경찰서에서 핵심내용을 기록하였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이와 같은 장한 거사(擧事)를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사모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에 빗돌[비석]에 새겨 그 개요(槪要)를 대략 거론하여 감히 잊지 않겠다는 뜻을 대신할 따름이다.
광복 16년 뒤, 경자(1960) 3월 1일 대한독립운동사적비 건립추진위원장 고창군수 김관묵(金寬默)은 삼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