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 271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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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에서 공적비가 건립되는 무장면 도곡리 271 시목리 마을회관으로 가는 길은 농악대가 준비하고 있었다.
시목리 마을회관앞에 송와박영관기념사업회에서많은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志士 松窩 朴永寬 功績碑(애국지사 송와 박영관 공적비)
추진배경
나라를 잃은 아픔에 비분강개하여 일제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국내 유일의 비밀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활약했던 독립투사 송와 박영관 선생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섰지만, '다물 청년당 취지서'와 '격고동포'를 보면 선생의 사상은 인류애의 진제와 세계평화주의에 기반한 것이었다.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 발전하고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4년 5월 박춘회님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밝히는 학술연구, 사생대회, 생가 현충시설지정, 기념관 건립, 장학사업 등을 추진해 왔다. 선생의 업적과 사상은 영원불멸의 것이라 믿지만, 선생이 나고 자란 터전은 초라함을 금할 수 없어 이에 선생을 기념하는 공적비를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아 박춘회, 진병태님의 거액찬조를 위시해 3년동안 전국 각처에서 300여명의 독지가들의 성금이 답지하였으며, 또한 도곡리 주민들은 공적비 건립에 필요한 부지를 흔쾌히 제공해 주었다. 여러분의 성의에 힘입어 선생께서 출생하신 이곳 도곡리 시목마을에 공적비를 건립하여 선생의 살신 구국의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추모하고 후진들의 애국심과 민족의식 함양에 기여하고자 하는 바이다.
대한민국 100년 10월 19일 서기 2018년 10월 19일
사)송와 박영관선생 공적비건립추진위원장 박중회 /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 이욱
나라를 잃은 아픔에 비분강개하여 일제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국내 유일의 비밀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활약했던 독립투사 송와 박영관 선생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섰지만, '다물 청년당 취지서'와 '격고동포'를 보면 선생의 사상은 인류애의 진제와 세계평화주의에 기반한 것이었다.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 발전하고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4년 5월 박춘회님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밝히는 학술연구, 사생대회, 생가 현충시설지정, 기념관 건립, 장학사업 등을 추진해 왔다. 선생의 업적과 사상은 영원불멸의 것이라 믿지만, 선생이 나고 자란 터전은 초라함을 금할 수 없어 이에 선생을 기념하는 공적비를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아 박춘회, 진병태님의 거액찬조를 위시해 3년동안 전국 각처에서 300여명의 독지가들의 성금이 답지하였으며, 또한 도곡리 주민들은 공적비 건립에 필요한 부지를 흔쾌히 제공해 주었다. 여러분의 성의에 힘입어 선생께서 출생하신 이곳 도곡리 시목마을에 공적비를 건립하여 선생의 살신 구국의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추모하고 후진들의 애국심과 민족의식 함양에 기여하고자 하는 바이다.
대한민국 100년 10월 19일 서기 2018년 10월 19일
사)송와 박영관선생 공적비건립추진위원장 박중회 /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 이욱
애국지사 박영관 선생 가계도
대한민국 100년 10월 19일 / 서기 2018년 10월 19일
대한민국 100년 10월 19일 / 서기 2018년 10월 19일
선생의 휘는 영관(永寬) 호는 송와(松窩)이다. 성은 박(朴)으로 관향(貫鄕)은 밀양이다. 규정공(糾正公) 현(玹)의 26대손이다. 1899년 (음)7월 7일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 284번지에서 경삼(敬三) 공(公)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나 출천지효(出天之孝)의 명성을 얻었고 빼어난 자질과 영매한 기풍으로 향리에 이름이 났다. 나라의 운이 비색(否塞)하여 일제의 침탈을 당하자 비분강개함을 금치 못하고 하루라도 빨리 이 치욕에서 벗어나는데 한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적극 호응하였다. 3월 15일 무장 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4백여 명의 주민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체 체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순간의 기지와 완력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5년의 세월 동안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전국을 방랑하며 와신상담 재기의 기회만을 노렸다. 1923년 3월 상해임시정부에서 작성한, 일본은 우리 원수이고 이 원수를 토멸하려면 오직 철혈(鐵血)이 있을 뿐으로 우리 동포는 이 대업을 완성하는데 용감하게 매진해야 한다'는 취지를 듣고 통의부에 가입하였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함께 할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역할을 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임시정부를 후원하는데서 멈추지 않았다. 1927년에는 직접 거사에 나설 계획을 세웠다. 전라도 농민들의 고혈을 착취하던 동양척식회사와 관공서 은행 등을 습격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인현 오오득 김종철 조순식 오석완 송시용 전기환 정기환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함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폭탄을 제조하고 총기를 구입하는 등 준비에 여념이 없던 중 안타깝게도 1928년 6월 거사 직전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국내에서 폭탄과 총기를 구입하여 무력 투쟁을 전개하려던 선생의 계획은 일제에는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었고 우리 동포에게는 독립의 염원을 더욱 자극하였다. 선생의 정신은 마침내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크게 타올랐다. 선생은 3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31년 11월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고문 후유증과 일제의 엄혹한 감시를 피해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두월리 947번지에서 은둔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호남 율계(律契)회장을 역임하며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루는데 매진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조국의 평화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75년 10월 19일 76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슬하에 3남4녀를
두었다. 장성군에서는 1972년 장성공원에 3.1운동열사 장성군 의적비를 건립하여 선생이 뜻을 기렸다. 전라북도에서는 2004년 덕진공원에 전북출신 독립유공자 현창비를 건립하면서 선생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1977년 12월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가 1990년 12월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을 높여 추서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공적이 있다. 하지만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한 몸 바치면서도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선생의 성품에 해가 될까 감히 더 이상은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작은 글을 남김으로써 선생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희생정신이 헛되이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2018년 10월 19일 세움 감수 국가보훈처 차장 심덕섭 순천대 교수 문학박사 이욱 씀
2018년 10월 19일 세움 감수 국가보훈처 차장 심덕섭 순천대 교수 문학박사 이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