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광대리 641-4
- 탐방로그
- 정창묵 의적비를 찾기 위해 고창군 대산면 광대리 641-4에 왔다. 해당 의적비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0년 건립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一止 鄭公 義蹟碑(일지 정공 의적비)
一止 鄭公 義蹟碑(일지 정공 의적비)
저 극악무도한 왜적은 우리 민족 불공재천의 원수이다. 지난 임진 1592년에 우리나라를 대거 침입하여 선조 임금이 몽진하고 의주로 파천하는 등 전강토를 8년간이나 병마로 짓밟더니 그 후 경술 1910년에 또 다시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36년 간 폭악한 정치로 생민을 억압한 바 있었으나 우리 민족은 이 양대 전란에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승리로 이끌어 국권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많은 충신의사들이 불원사생하고 위국진충한 투지의 결정인바 일지 정공 또한 그 중의 한 분이로다. 공의 휘는 창묵이요 자는 봉진이며 일지는 그 호요 진주인이니 고려 문하시중으로 시 충장공인 휘 황이 훈공으로 진양군에 책봉되어 낙남하신 조상이요 임란 창의사 망북 헌 휘 흘의 11대손이며 덕재 휘 근학의 장자이다. 공은 을유
저 극악무도한 왜적은 우리 민족 불공재천의 원수이다. 지난 임진 1592년에 우리나라를 대거 침입하여 선조 임금이 몽진하고 의주로 파천하는 등 전강토를 8년간이나 병마로 짓밟더니 그 후 경술 1910년에 또 다시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강점하고 36년 간 폭악한 정치로 생민을 억압한 바 있었으나 우리 민족은 이 양대 전란에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승리로 이끌어 국권을 회복하였으니 이는 많은 충신의사들이 불원사생하고 위국진충한 투지의 결정인바 일지 정공 또한 그 중의 한 분이로다. 공의 휘는 창묵이요 자는 봉진이며 일지는 그 호요 진주인이니 고려 문하시중으로 시 충장공인 휘 황이 훈공으로 진양군에 책봉되어 낙남하신 조상이요 임란 창의사 망북 헌 휘 흘의 11대손이며 덕재 휘 근학의 장자이다. 공은 을유
1885년 5월 26일에 대산면 광대리 신평 고향집에서 태어나 천성이 순후하여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제형에게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지기가 장중하여 모든 사리에 대한 시비의 판단이 한칼로 자르듯이 공정함에 향리 사람들이 추복하였다. 경술년의 국치를 당하자 공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자처하여 적개심을 품고 지내다가 마침내 정읍을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일원을 동하여 많은 동지를 수합하여 신인동맹이란 종교단체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중 일제는 그 침략의 마수를 중국대륙에까지 뻐처 마침내 세계대전이 발발되자 우리 민족에 대한 강압과 혹사는 더욱 극에 달한지라 공은 많은 동지들과 구국결사대를 결성하고 적의 후방을 궤란하기 위하여 당시 김제 주둔 왜군 헌병대와 김제경찰서를 습격하기로 치밀한 계획이 서있는바 비인간적인 한 배신자의 밀고로 거사직전에 발로되어 공 등 동료 40여인이 왜경에 피체되었으니 즉 경진년 1940년 12월 15일이다. 그 후 3년간을 미결인으로 혹독한 고문에도 불굴하며 조선인이 자기 나라를 찾아 독립하겠다는 일이 무슨 죄가 되느냐 하고 끝까지 항거하며 불복하다가 계미 1943년 9월에야 1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하고 귀가하였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든 중 이듬해 을유 1945년 8월 15일에 조국이 광복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병석에서 밖으로 뛰쳐나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이제야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사무여한이라 하여 크게 기뻐하였다. 경자 3월 25일에 별세하니 향년 76이요. 대산면 광대리리 신평 후록 묘좌원에 안장하였다. 아! 장하도다. 공은 초야 일필부로 평생동안 조국을 광복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다가 일생을 마쳤으니 저 한말의 고관대작으로서 판군매국한 역도들이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공을 대하리요. 천도가 유상하여 공이 별세한지 38년이 된 정축 광복절에 정부에서 공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하고 대통령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1885년 5월 26일에 대산면 광대리 신평 고향집에서 태어나 천성이 순후하여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제형에게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지기가 장중하여 모든 사리에 대한 시비의 판단이 한칼로 자르듯이 공정함에 향리 사람들이 추복하였다. 경술년의 국치를 당하자 공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자처하여 적개심을 품고 지내다가 마침내 정읍을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일원을 동하여 많은 동지를 수합하여 신인동맹이란 종교단체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중 일제는 그 침략의 마수를 중국대륙에까지 뻐처 마침내 세계대전이 발발되자 우리 민족에 대한 강압과 혹사는 더욱 극에 달한지라 공은 많은 동지들과 구국결사대를 결성하고 적의 후방을 궤란하기 위하여 당시 김제 주둔 왜군 헌병대와 김제경찰서를 습격하기로 치밀한 계획이 서있는바 비인간적인 한 배신자의 밀고로 거사직전에 발로되어 공 등 동료 40여인이 왜경에 피체되었으니 즉 경진년 1940년 12월 15일이다. 그 후 3년간을 미결인으로 혹독한 고문에도 불굴하며 조선인이 자기 나라를 찾아 독립하겠다는 일이 무슨 죄가 되느냐 하고 끝까지 항거하며 불복하다가 계미 1943년 9월에야 1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하고 귀가하였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든 중 이듬해 을유 1945년 8월 15일에 조국이 광복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병석에서 밖으로 뛰쳐나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이제야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사무여한이라 하여 크게 기뻐하였다. 경자 3월 25일에 별세하니 향년 76이요. 대산면 광대리리 신평 후록 묘좌원에 안장하였다. 아! 장하도다. 공은 초야 일필부로 평생동안 조국을 광복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다가 일생을 마쳤으니 저 한말의 고관대작으로서 판군매국한 역도들이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공을 대하리요. 천도가 유상하여 공이 별세한지 38년이 된 정축 광복절에 정부에서 공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하고 대통령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고 국비로 공의 의적비를 수립하며 후손에 보훈연금을 지급하게 되니 이는 공이 쌓은 공적에 대한 보상의 특전이로다. 초손 갑석 원석 기석이 그 삼종숙 기종과 함께 나를 찾아와 비문을 청하는 바 내 비록 재둔학부 하나 어찌 사양할 수 잇으리요. 이에 공의 재종제 장묵이 기술한 공의 행장과 일제시 공에 대한 재판기록부 등을 참조하여 우와 서술하여 세인에게 공의 의적을 알리는 바이다.
성균관 전학 광산 김태석 삼가 짓고 족제 정묵 삼가 쓰다. 단군기 4331년 술인 3월
성균관 전학 광산 김태석 삼가 짓고 족제 정묵 삼가 쓰다. 단군기 4331년 술인 3월
하고 국비로 공의 의적비를 수립하며 후손에 보훈연금을 지급하게 되니 이는 공이 쌓은 공적에 대한 보상의 특전이로다. 초손 갑석 원석 기석이 그 삼종숙 기종과 함께 나를 찾아와 비문을 청하는 바 내 비록 재둔학부 하나 어찌 사양할 수 잇으리요. 이에 공의 재종제 장묵이 기술한 공의 행장과 일제시 공에 대한 재판기록부 등을 참조하여 우와 서술하여 세인에게 공의 의적을 알리는 바이다.
성균관 전학 광산 김태석 삼가 짓고 족제 정묵 삼가 쓰다. 단군기 4331년 술인 3월
성균관 전학 광산 김태석 삼가 짓고 족제 정묵 삼가 쓰다. 단군기 4331년 술인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