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주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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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94
탐방로그
갑오동학농민군 고창주의장 추모비를 찾기 위해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94에 왔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소나무 3그루와 당산나무가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을 바탕으로 삼가 서술하면서 공의 숭고한 얼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전라북도 문화전문위원 이기화 근찬
고창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수
단기 4327년 감술 5월일
甲午東學農民軍高昶柱義將追慕碑(갑오동학농민군 고창주의장 추모비)
갑오동학농민혁명군 고창주 의장 추모비
무릇 민족의 역사가 열린곳에 민족의 정기가 있고 민족의 위난속에 민족의 충렬이 꽃피워진다 여기 개화기의 구한말 사직의 기강이 문란하여 탐관오리가 발호하고 민생이 도턴에 빠져 봉건전제의 폐정이 극에 이르고 외세의 침학으로 국난위국을 당하였을때 분연히 일어나 동학농민혁명의 민족봉기를 결연히 선도하고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고공창주 자 순택 의장의 거룩한 넋과 공적을 기리고자 한다. 공
은 1858년 9월14일 당시 이곳 무장군 동음치면 당산마을에서 중시조 장흥백중 筵(연)의 21세손이요 진사 자신의 15세손으로 부 제량 모 청주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과 무예에 능하였고 정훈으로 가통을 이으매 대대로 선비요 효우의절이 행의사표였다. 이립의 고비에 이르러 그 웅지를 펴내니 제세요 구민이었다. 동학의 대접주 손화중포에 입도한 공은 민초의 선구자 전봉준휘하에서 일촌지기 송문수누 문덕중과 더불어 구적산하 당산골에서 농민군양성의 간재들도 맡았다. 갑오봉기때 송문수의 부장으로 영광무장에서 출전하였다가 체포되어 1895년 3월 3일 법무아문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방면되었으나 귀향길에 고부에서 다시 잡혀 무장으로 압송 이도란정죄목으로 3월 27일 사자등 총살형장에서 세 동지와 함께 산화함에 인근지덕으로 겨우 시신을 거두어 두암산하 갑좌 경향에 죽렴장하니 오호통재라 반봉건 반외세로 보국안민의 대의를 펴내다가 혁명좌절의 비탄과 비분강개의 한을 품은채 끝내 반역의 누명을 쓰고 구천을 해맸는데 갑오거사후 백준년에 이른 오늘에사 역사의 재평가리에 통한의 신원을 이루게 됨에 만시지탄이나 향리의 후진들이 공의 높은 절의와 유덕을 추모하여 그 뜻을 비각한다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에 사승을 두고 중로들과 후손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