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진격로(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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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94
탐방로그
동학농민군 진격로를 찾기 위해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94에 왔다.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지로 안내판 제목은 예향천리 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동학농민군 훈련장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1. 동학농민혁명 무장 기포지, 2. 왕제산(여시뫼), 3. 무장현관아와 읍성, 4. 선운사도솔암 마애불, 5. 전봉준 생가, 6. 정백현 생가, 손화중 도소, 8. 고창읍성, 홍성동헌, 10. 손화중 피체지
예향천리 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지
이 곳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는 1894년 (갑오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이다. 이땅의 민중이 떨쳐 일어나 민족과 역사의 주인됨을 세계 만방에 선포한 우리 근대사의 자랑스런 혁명을 일으킨 곳이다. 당시 가장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농민들은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라고 하는 인본주의 사상의 동학교와 결합되면서 인간 본래의 인격과 존엄성을 지키고,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제도 관료사회도 청산하여 새 세상을 열고자 하였다. 당시 동학교 2세교주 최시형 (북접)은 충청도 보은에 좌정하고 있었고 무장현 괴피의 손화중 (남접) 대접주는 이른바 선운사 도솔암 미륵비기 탈취사건 이후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사발통문 거사계획등 고부농민봉기를 이끌었던 전봉준은 두어 달 동안의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세력이 약화되었을 때인 계사년 12월 10일 공음년 구수내 송문수집에서의 회동에 이어 갑오년 2월 19일 공음면 신촌의 김성칠 접주집에서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임천서 송문수 정백현 강경중 김영달 고영숙 최재형 등 13명의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시기상조(時機尙早)를 말하며 미루어 오던 손화중을 설득, 동참을 이끌어 냄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동학농민혁명을 도모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구적산 아홉골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해 연병장 같은 모래사장이 크게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의 훈련과 집합에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전봉준을 도솔대장(都率大將)으로 한 농민군은 포고문(布告文)과 격문(檄文)등을 띄우고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義)의 큰 깃발을 높이 들고 동학농민혁명의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자(字) 명숙(明淑). 호 해몽(海蒙) 관(貫)천안
천안전씨 족보에 의하면 이름이 철로인데 봉준은 아명인듯 하며 체구가 작고 야무져 녹두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고창읍 당촌리에서 출생하여 13세무렵까지 살다 전주 구미리, 정읍 산외면 동곡리, 그리고 이평면 양교리에서 다시 고개넘어 조소리로 이사 하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소장을 올릴때에는 아버지 전창혁이 먼저 김도삼 정일서등과 3장두로 나섰으나 전창혁이 심한 매를 맞아 장독으로 죽은뒤에 전봉준등이 고부봉기를 주도하여 2개월 이상 버터 왔으나 내부조직의 약화와 신임군수 박원명의 회유로 해산하기에 이른다. 이어 안핵사 이용대의 만행에 동지 수십인과 함께 무장의 손화중에게 숨어든다. 손화중과는 1892년 11월 삼례취회때부터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과 더불어 우리사회 부조리에 대한 변혁을 지향해왔고 1894년 2월 19일 전봉준을 비롯한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최재형 등 13명이 손화중을 설득 갑오년 (1894년) 3월 20일 무장현 당산리 구수내에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동학농민혁명 1차봉기를 일으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해 초겨울 공주 우금티전투를 시작으로 패전을 거듭하며 쫓기다가 겨울이 깊어가는 11월 말 순창 피노리에서 친구 김경천의 밀고로 붙잡혀 일본인이 배석한 5차례의 재판을 받고 사형이 언도된 후 다음날 죽을때까지도 자신의 의지와 신념에 조금도 굽힘이 없었으며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을 담아 마지막 시 한편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 했다. 때는 1895년 3월 3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