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59
- 탐방로그
- 전봉준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당촌마을이다. 한편 정읍시 이평면에도 1878년이후 전봉준이 살았던 집을 찾을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전주고부 녹두새야/어서 바삐 날아가라/댓잎 솔잎 푸르다고/하절인줄 알았더니/백설이 펄펄/엄동설한 되었구나
새야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전주고부 녹두새야/어서 바삐 날아가라/댓잎 솔잎 푸르다고/하절인줄 알았더니/백설이 펄펄/엄동설한 되었구나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59 당촌마을 전봉준장군 생가를 찾아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 생가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 생가터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이자 지도자였던 전봉준장군을 1855년 12월 3일 이 곳 고창읍 죽림리 63번지(당촌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사던 전창혁(본관:천안)의 아들로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살았다. 당시엔 서당,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 기간중 모두 소실되었다. 그는 오척 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얻어 일명 녹두장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지도부는 1894년 3월 20일(음력)에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인 무장기포지(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서 4,000여명의 농민군이 모인 가운데 갑오동학혁명운동 최초의 봉기선언문인 창의문을 발표하고 조직적인 항쟁에 들어감으로써 전국농민전쟁으로 발건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봉건적 지배세력에 의한 수탈과 억압에 반대한 민족운동이며 제국주의적 외세 침략에 맞선 국권수호운동으로 갑오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의 민중항젱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이자 지도자였던 전봉준장군을 1855년 12월 3일 이 곳 고창읍 죽림리 63번지(당촌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사던 전창혁(본관:천안)의 아들로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살았다. 당시엔 서당,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 기간중 모두 소실되었다. 그는 오척 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얻어 일명 녹두장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지도부는 1894년 3월 20일(음력)에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인 무장기포지(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서 4,000여명의 농민군이 모인 가운데 갑오동학혁명운동 최초의 봉기선언문인 창의문을 발표하고 조직적인 항쟁에 들어감으로써 전국농민전쟁으로 발건하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봉건적 지배세력에 의한 수탈과 억압에 반대한 민족운동이며 제국주의적 외세 침략에 맞선 국권수호운동으로 갑오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의 민중항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