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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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석교리 산4-1
탐방로그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를 찾기 위해 고창군 고창읍 석교리 산4-1에 왔다. 고석진, 고순진, 고예진, 고치범 네 분의 애국지사의 기리기 위해 2014년 고창 군민들의 힘을 합쳐 해당 비석을 세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의 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는 가히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로 악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권을 회복해 민족을 살리고자 했던 우국지사들은 일제의 노예로 사는 것을 과감히 거부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선비정신으로 무장한 전국의 명망있는 유리데표 137분이 목숨을 걸고 참여해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설파한 1919년 3월의 파리장서 독립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137분의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무단 식민통치를 강하게 규탄하고 민족독립을 강조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비밀리에 작성하여 당시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위해 열린 파리만국평화회의의 대표단을 비롯해 국내외에 대거 배포해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오늘날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통일한국을 건설하고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을 저지하기 위해 정교하게 국제 외교전을 벌여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파리장서 독립운동은 시사점이 매우 크다. 현재 파리장서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 전국 여러 곳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유림대표 137분 중 고석진, 고예진, 고순진, 고제만 네 분이 참여하신 고창세는 아직껏 기념비가 없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특히 네 선생은 1905년 말 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주권을 침탈한 일제에 항거해 스승인 면안 최익현 선생을 모시고 1906년 6월 의병 투쟁을 벌이시다가 투옥됐다. 네 분은 당시 충남 청양에 기거하시던 면암 선생께 의병
투쟁계획을 말씀드린 뒤 고창 신림면 가평리의 방호정사, 현 도동서원에서 수 개월간 의병을 준비하며 "우리 의병군사의 올바름을 빋고 적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팔도사민창의 포고문을 작성해 각지에 배포해 의병과 무기, 군자금을 모집하고 전투에 참여했다. 면암 의병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거의한 뒤 정읍, 고창, 순창, 곡성, 남원으로 잇따라 진출하며 순세가 최고 800여명에 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분들의 헌신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을사의병에서 끝내 통한의 분루를 삼키긴 했으나 네 분은 굴하지 않고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활동한 유림의 비밀결사조직인 독립의군부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또 1919년 3월 1일에는 고종의 인산일을 맞아 대한문앞에서 일제를 규탄하고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예진선생 등은 1919년 3월 6일 민족의 독립을 강하게 요구하는 선언장서를 작성해 종로 4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크게 낭독하고 조선총독에게 전달하다가 투옥됐다. 선언장서 투쟁은 동아일보 1950년 3월 1일자에 "삼일운동 비사 33인 뒤이은 12지사, 무력행사에도 의연, 종로4거리에서 독립만세 고창. 총독과 직접 단판"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다됐다. 정부는 네분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을 기려 고석진,고예진,고제만 선생께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고순진선생께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고석진, 고예진 선생은 면암 선생과 함께 도동서원에 배향돼 있으며 해마다 5월 5일에 추모식이 거행되고 있다. 이에 충의의 고장인 고창에서는 민관이 합동으로 기념비를 건립하여 네분 선생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이를 자손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단기4347년 서기 2014년 3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