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경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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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석교리 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사 박경래(朴慶來) 도경(道京)은 자소(自少)로 늠름(凜凜)한 대지(大志)와 애국애족의 충의심이 장하신 분으로서 한말에 벌왜적(伐倭賊)이 소위 을사협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유린(蹂躪)하게 되니 민족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었다. 의사는 융희(隆熙) 원년(元年, 1907년)에 호남창의대장 기삼연(奇參衍) 선생 막하에서 포사장(砲射將)으로 예지한 기략(氣略)과 탁월한 포사술을 발휘하시든 중에 기공(奇公)이 불행우해(不幸遇害) 하시니 동지들의 중망(衆望)에 따라 의사는 창의대장에 취임되여 섬멸왜적(殲滅倭賊)에
혁혁한 위훈(偉勳)을 세우시니 이 어찌 민족정기의 발로와 진충보국의 대의가 아니리오. 의사는 22면(面)의 접전에 왜적 40여 급을 사살하고 전리병기(戰利兵器)를 다략(多掠)하야 전공을 거두는 중 사살 10여 탄창(彈槍\)하고 방장산(方丈山) 석굴중(石窟中)에 치료하시는 차(次) 노친(老親)이 왜적에게 피체수욕(被逮受辱)함을 들으시고 노친(老親)과 납치(拉致)된 동지(同志)의 석방을 위하여 자진피체(自進被逮)되어 대구에 압송된 후 피적(被賊)의 혹형(酷刑)에도 백절불굴(百折不屈)하시다가 옥중 음독(飮毒) 자결하시니 때는 경술(庚戌) 2월 8일로서 수문(壽絻) 37세이었다.
오호라! 일생에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흥적분투(興賊奮鬪)하여 천험만겁(千險萬劫)한 생애에서 조국의 광복과 구적(仇賊)의 도둔(逃遁)함을 보지 못하시고 구천(九泉)에 가시오니 평소 숭모하는 우리 고장의 비애는 자못 컸도다. 당시 의사의 유해를 대구 유림에서 수감(收歛)하여 향리인이 고창에 반묘(返墓)할 적에 각 군 유림이 연락봉송하다. 의사의 애국충의는 천하만세(天下萬世)에 영원히 빛날 사실이며 왜적의 독아(毒牙)에 탈출된 오늘날 그 위대한 공적이야 말로 다시 한 번 죽백(竹帛)에 빛나도다.
불소 본군에 이임(莅任)하여 시기에 늦은 감이 부무(不無)하나 전교 김구현(典校金九鉉)씨의 현노(賢勞)와 유림
제현의 협찬(協贊)하에 유서 깊은 성산 일우(一隅)에 이묘(移墓)하고 일편정석(一片貞石)에 의적을 약기(略記)하여 만세에 송덕하다.
단기 4296년 2월 고창군수 신상우 짓고, 안동 김정회 쓰다.
고창여자중고 정문 앞에 있다고 소개되어 있는 한말의사 박도경 추모비가 이 곳에 있었다.
한말의사 박도경(본명 경래)은 1874년 고수면 은사리에서 출생 호남 창의대장 기삼연 휘하 포사장으로 도처에서 활약하다 붙잡히어 37세로 대구감옥에서 그들의 손에 죽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자결하였다. 1963년 의사의 묘를 고수면 은사골에서 단군성전 옆으로 옮기고 추모비를 세웠는데 2009년에 묘는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고 추모비는 의향의 고장 지원과 유림의 뜻을 모아 이곳으로 옮겼으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1년 6월.
한말의사 밀양박공 도경 추모비(韓末義士密陽朴公道京追慕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