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해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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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차리 748-3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순국선열 화은 양공 재해 유적비
순국선열 화은 양공 재해 유적비문 설명
공의 본관은 제주양씨 호는 화은 자는 순집 휘는 재해이시며 청풍면 백운리에서 1855.4.1에 출생하셨다. 시조의 휘는 양을나이시며 중세조는 정능 예강공 학포 휘는 행손선생의 13세조라 공은 성품이 청렴강직하고 불의와 타협을 안 하시고 의분심이 강한 재덕과인한 한학자라. 면암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문하생으로 충효 정의 정신과 공맹지도를 수학하여 무예가 뛰어난 선비라 때는 조선말기 시대로 1895년 일제가 국모인 명성황후를 자객을 시켜 시혜하고 고종황제의 아관파천이 있었으며 1908년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함에 국운이 쇠약한때라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로다. 이에 분노한 대한제국 군민들은 비분강개하고 살신성인하며 숭고한 애국정신으로 조국수호에 몸바치셨다.
이때 공은 동학난을 당하여 능주고을 목사에게 제세안민정책을 제안하였고 단발령이 내려짐에 화망건의를 자책하고 화학산중에 은거행의 하시니 화은처라사라.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 통탄하며 면암선생과 창의거사를 모의하고 호남의병을 모집 순창으로 행군할세 일본헌병과 대치벌이니 일 헌병대의 총탄에 정시해의병이 맞아 순직하고 의병단 수백여명이 모두 흩어지느니라. 끝까지 항거한 화은선생을 비롯한 12명(최익현,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물달환, 임훈주, 조우식, 조영선, 최제학, 나기덕, 이용길, 유해용)의병은 죽기를 각오하고 물러서지 않다. 공이 경성감옥에 갇혀
적의 괴수가 심문하니 공의 나이 50이라. 천명을 아느냐?하니 공이 말하되 "순천리수인사시지명야라"하였다. 왜구가 속이지 말고 작언하라 위협하니 굴하지 않고 생을 버리고 의를 따라 행동함이 어찌 속임이 있겠느냐? 또 되묻되 글을 읽고 화적된 것은 어떤일이냐 호통치니 답하되 왜인이 남의 나라를 뺴앗은 것이 큰 도적이지 나라를 위해 의를 행함이 어찌 화적이란 말이냐 하였다. 훗날 면암은 대마도에 피구되고 화은공을 비롯한 12의사는 수태백도의 형을 가하여 축출하니 고향에 돌아와 백절미회하고 구사불변이라돠. 거사는 비록 성공치 못하였으나 구국을 위한 의거로 후세에 길이 빛나리라. 면옹이 대마도에서 별세 운구함에 뼈를 상하여 문병치 못하고 슬픔의 세월속에 71세로 영면하시니 백운산에 장사후 1991.11.1엘 대전국립묘지로 안장하였다. 1977년 12.13 조국자주독립에 헌신하였음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12.26 헌법규정에 따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다. 세 임인 모춘에 은진, 송재성님이 공적비문을 지으셨으며 서기 2006년 입하지절에 족손 소암동하문루하고 추가 공적비분을 지으셨다. 순국선열의 구국충정에 빛난 유적을 거북좌대 무궁화에 수비각명하여 충의 정신 영원히 간직하고 구국충성의 지표로 삼고자 이에 청풍면 번영회장 문찬식을 비롯한 면민의 뜻을 모아 화순군의 예산지원을 받아 순국선열을 추모하며 이에 공적비를 세우다.
화순군 청풍면 차리 748-32 삼거리 도로변 순국선열 양재해 선생의 유적비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