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60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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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의 쌍산의소 안내판에서 올라가서 이곳으로 내려왔지만, 다른 쌍산의소 유적은 찾을 수 없었다.
보성군, 광양시 탐방을 마친 후 다시 광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쌍산의소 탐방을 위해서 왔다.
쌍봉다원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네비게이터는 전혀 쓸 수가 없다.
어제와는 반대로 쌍봉다원쪽에서 올라갔다. 쌍봉다원에서 물어볼려고 하였지만, 아무도 없었다.
쌍봉다원에서 막사터 쪽이 아닌 다른 쪽으로 가다보니 마을이 보인다.
이곳에 석천 임상영의적비, 의병마을, 최초 결의지, 무기제조터가 모두 있었다.
마침 이 마을에서 이곳의 주민을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유적들도 만날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을 존모하여 감히 사양할수가 없다. 오호라 국가의 흥망치난은 위정자에게 책이 있지만 인심의 우군애국은 조쟈의 차가 있을수 없다. 공은 촌록의 은총에도 젖지 못한 신분이었지만 국난에 기신하여 적을 항거하다가 무한의 인고를 겪고 후회없이 살다가 가신 분이니 어찌 흠앙할만하지 않는가. 청문하러온자는 공의 손 홍주와 증손 석기다.
석천 임공 휘 상영 의적비
이곳 화순의 이양면 증리는 고 의사 석천 임공의 고거다. 공은 평택인이니 고려말 두문재 휘 선미의 후요, 사인 휘 명기의 자니 휘는 상영, 자는 윤경이오 석천은 호니, 별호는 삼계다. 이씨조선 순조 병신생으로 고종 을사년 경 아국이 도이와 늑약을 체결하고 국세가 급사하여 조석을 난측하게되자 우분을 참지못하고 구국의 일념으로 초망해오다가 동향의 양향사 회일이 창의한단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찾아가서 자신의 심지를 밝히고 동사할것을 청하자 양공이
대희하여 서로 결탁하고 드디어 기병을 했으니 때는 기유년이었다. 공은 양창의장의 참모가 되어 의사 임노복, 임노성등 수십인을 규집하고 병량 수백석도 취합하여 의열에 참여했으며 양공도 전적으로 공을 신임하여 모군에서 출병까지의 모든 계략을 상의하고 량곡, 군기등 모든 물자의 운영을 일체 공에게 위탁을 했으며 공은 진심갈력하여 소기에 어긋남이 없었다. 출군을 하면서 먼저 적에게 선성을 보내고 인군하여 능주에 이르니 이곳의 주왜는 이미 철퇴를 하였었고 전향하여 화순에 당도하니 그곳 왜병도 이미 도피하고 없었다. 다시 전진하여 동복에 도착 일숙을 했는데 다음날 새벽 광주의 둔왜가 대대를 이끌고와 졸습을 하므로 교전을 했으나 세부적으로 아군이 패하여 혹은 사상하고 혹은 피집하여 잔파하니 웅지의 장거는 어이없이 종막을 내리고 말았다. 공은 귀가후 그대로 칩거하여 세사에 절의를 하였으나 잇달은 왜적의 고략으로 중상이 되어 미구에 운명하였으니 향년 74세였다. 오호라 공의 즉세가 100년이되었다. 그간에 국가는 적치로부터 광복이 되어 전일 항왜의 의거에 나섰던 열사들이 차제로 포창되고 공훈이 추서되어 공의 의적도 크게 빛을 보게되었다. 이제 공의 손증들이 공의 유적지에 입비를 하여 영구불후를 도모할량으로 불녕을 찾아와 소각문을 청하니 내 공의 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