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맹리 산34-2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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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북면 맹리에 있는 의병 이원중 선생 항일사적비를 힘들게 찾아왔다.
뒷편에 있는 묘소에 올라가 보았다. 첫번째 묘소에는 아무런 비석이 없었다.
그 뒤에 있는 묘소는 이원중 애국지사의 묘소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병 전주이공 원중지묘 배 영인 밀양박씨 쌍분 간좌
전남 화순군 북면 맹리에 있는 의병 이원중 선생 항일사적비를 찾아왔다.
의병 전주이공 원중 항일사적비(義兵全州李公元仲抗日事蹟碑)
公(공)은 一八七九년 三월 二일 和順郡(화순군) 北面(북면) 孟里(맹리)에서 아버님 李孝善(이효선) 어머니 金敬禮(김경례) 사이에서 長男(장남)으로 태어나셨다. 一九○五년 온 국민의 통곡 속에 소위 乙巳(을사) 五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公(공)은 倭賊(왜적)의 침략에 분개하여 一九○六년 志友(지우) 李奉煥(이봉환) 崔永瑞(최영서) 嚴順五(엄순오) 등과 倡義(창의)를 맹서하고 義兵將(의병장) 高光洵(고광순)을 만나 壯丁(장정)을 모으고 兵器(병기)를 조달하니
義勢(의세)가 크게 증강되었다. 一九○七년 八월 高光洵(고광순)등 약 三十명과 함께 同福(동복)의 倭賊(왜적)을 쳐부수고 谷城(곡성) 順天(순천) 求禮(구례)를 순회 行軍(행군)하며 倭賊(왜적)을 격살하고 義勢(의세) 확장에 진력하시다가 一九○八년 九월 玉果(옥과) 헌병분견소에 체포되어 光州(광주)로 압송된 후 징역 五년을 선고받고 大邱(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시었다. 一九一三년 五월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셨으나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一九一八년 五월 二일에 卒(졸)하니 北面(북면) 孟里(맹리) 先山(선산)에 모셨다. 슬하에 四女(사녀) 뿐 아들이 없으며 아우 承祿(승록)의 次男(차남) 南洙(남수)로 입후하였다. 配(배)는 密陽朴氏(밀양박씨)니 양 子婦(자부) 嚴金順(엄금순)의 효성이 극진하여 칭송이 높다. 四孫(사손) 成均(성균)이 公(공)의 판결문 등을 거증자료 수집에 열성을 다하여 一九九○년 政府(정부)에서 建國勳章(건국훈장)을 追敍(추서) 하였는바 事蹟碑(사적비)를 세우기로 合議(합의)하고 碑銘(비명)을 나에게 간청하기에 그 愛國忠節(애국충절)에 감읍하여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이렇게 쓴다. 自主統一(자주통일) 完遂(완수)하여 公(공)의 遺芳(유방) 千萬年(천만년) 기리리.
뒷편에 있는 묘소에 올라가 보았다. 첫번째 묘소에는 아무런 비석이 없었다.
그 뒤에 있는 묘소는 이원중 애국지사의 묘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