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운농리 1017-25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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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의사 이공 유적비 탐방 후 농소마을 이장님과 전화통화가 되어 다시 농소마을회관 옆 쉼터를 찾았다.
GPS 상의 주소는 화순군 동면 운농리 1017-25이다.
의병장의 이름을 잘못 알아서 서훈을 받지 못하신 분으로 알았는데, 이렇게 고향 마을에서 이러한 시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할아버지 할머니 비석
농소마을에는 마을에 들어오는 화(禍)와 재앙을 막아주는 액맥이 역할을 하였던 2개의 선돌이 있다. 그 기원과 연원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마을사람들은 그것을 할아버지, 할머니 비석이라고 불렀다. 해마다 대보름날이면 젊은이들의 횃불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싸움에서 이겨야 풍년이 들고 재앙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해져왔다. 그래서 대보름날이 다가오면 마을주민들 모두 모여 두 개의 비석 앞에서 제를 지내며 마을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할머니 비석은 서쪽 신운마을과의 겨루기에서, 할아버지 비석은 북쪽 찰동 ㅁ을과의 겨루기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곳에 있는 선돌은 할머니 비석이며, 할아버지 비석은 마을 잿등 입구에 세워져 있다.
농소마을에는 마을에 들어오는 화(禍)와 재앙을 막아주는 액맥이 역할을 하였던 2개의 선돌이 있다. 그 기원과 연원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마을사람들은 그것을 할아버지, 할머니 비석이라고 불렀다. 해마다 대보름날이면 젊은이들의 횃불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싸움에서 이겨야 풍년이 들고 재앙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해져왔다. 그래서 대보름날이 다가오면 마을주민들 모두 모여 두 개의 비석 앞에서 제를 지내며 마을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할머니 비석은 서쪽 신운마을과의 겨루기에서, 할아버지 비석은 북쪽 찰동 ㅁ을과의 겨루기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이곳에 있는 선돌은 할머니 비석이며, 할아버지 비석은 마을 잿등 입구에 세워져 있다.
저 앞쪽에 태극기가 걸려았눈 곳이 마을회관이다.
농소마을회관 옆 쉼터를 찾았다.
義士 李公 遺蹟碑(의사 이공 유적비)
이관회 의병장 약력
화순군 동면 농소마을 출신 이관회(李官會, 1871~1910) 의병장은 안규홍(安圭洪) 의진의 선봉장으로서 1907년부터 1909년 7월까지 약 2년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1909년 4월 '남해대토벌작전'을 벌여 남도 각지의 의병대를 해산케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관회 의병장은 1910년 체포,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화순군 동면 농소마을 출신 이관회(李官會, 1871~1910) 의병장은 안규홍(安圭洪) 의진의 선봉장으로서 1907년부터 1909년 7월까지 약 2년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1909년 4월 '남해대토벌작전'을 벌여 남도 각지의 의병대를 해산케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관회 의병장은 1910년 체포,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義兵 李官會 義士 遺蹟碑(의병 이관회 의사 유적비)
義兵 李官會 義士 遺蹟碑(의병 이관회 의사 유적비)
화순군 운농리 농소마을 출신의 이관회(李官會, 1871~1910) 의사는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고,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하자 분연히 일어서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그는 안규홍(安圭洪) 의진의 선봉장으로서 1908년 2월, 일본군의 '순천, 벌교 간 의병군토벌작전' 계획을 탐지하고 보성군 득량면 파청마을 일대에 복병하여 일군 2개 부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진산리(보성군 문덕면) 전투와 운월치 고개(화순 동복과 주암 사이에 있는 고개)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1908년 8월, 보성군 복내면 원봉마을의 일본군 기병주둔소를 야습하여 일본군 50여명을 사살하고 다량의 물자와 화약을 접수하는 등 1909년 7월까지 약 2년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위기를 느낀 일본군 사령부는 1909년 4월 '남해대토벌작전'을 벌여 가족과 마을주민을 협박하는 등 대대적인 의병 소탕작전을 펼쳐 안규홍 의진 등 남도 각지의 의병대를 자진 해산케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관희 의사는 1910년 체포, 처형되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화순군 운농리 농소마을 출신의 이관회(李官會, 1871~1910) 의사는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고,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하자 분연히 일어서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그는 안규홍(安圭洪) 의진의 선봉장으로서 1908년 2월, 일본군의 '순천, 벌교 간 의병군토벌작전' 계획을 탐지하고 보성군 득량면 파청마을 일대에 복병하여 일군 2개 부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진산리(보성군 문덕면) 전투와 운월치 고개(화순 동복과 주암 사이에 있는 고개)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1908년 8월, 보성군 복내면 원봉마을의 일본군 기병주둔소를 야습하여 일본군 50여명을 사살하고 다량의 물자와 화약을 접수하는 등 1909년 7월까지 약 2년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위기를 느낀 일본군 사령부는 1909년 4월 '남해대토벌작전'을 벌여 가족과 마을주민을 협박하는 등 대대적인 의병 소탕작전을 펼쳐 안규홍 의진 등 남도 각지의 의병대를 자진 해산케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관희 의사는 1910년 체포, 처형되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비석